옥저와 동예, 고구려의 그림자 아래 놓이다: 해안가 소국들의 역사와 운명

고구려, 부여와 같은 강력한 국가들의 기상 아래, 한반도 동해안에는 옥저와 동예라는 작은 부족 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고구려의 막강한 힘에 가려져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한반도 고대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옥저와 동예의 역사를 통해 당시 한반도 북방 민족들의 생활상과 국가 간의 역학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 해안가 소국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거대한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서 어떻게 그들의 존재를 지켜나갔을까요?

바다와 맞닿은 땅, 옥저의 삶

옥저는 함경남도 일대, 즉 한반도의 동북 해안가에 위치했던 부족 국가였습니다. 지리적 특성상 넓은 평야 지대보다는 산악과 바다가 어우러진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주된 생업은 농업보다는 해산물 채취와 소금 생산에 집중되었습니다. 특히 소금은 당시 매우 귀한 자원이었기에 옥저는 이를 통해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옥저의 사회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읍락(마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졌으며, 각 읍락에는 삼로(三老)나 후(侯)와 같은 지배자가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각 읍락의 행정과 군사를 관장하는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옥저는 '민며느리제'라는 독특한 혼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린 신부를 미리 신랑 집으로 데려와 성장시킨 후 혼례를 치르는 제도로, 노동력 확보와 가문의 유지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옥저에는 '가족 공동 무덤'이라는 장례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가족이 죽으면 일단 시신을 매장하고, 나중에 뼈만 추려 목곽(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하여 한 가족의 뼈를 한 무덤에 합장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조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옥저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동해의 선물, 동예의 특산물과 풍속

옥저의 남쪽에 위치했던 동예는 오늘날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 잡았던 부족 국가였습니다. 동예 역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해안가에 위치하여 어업에 종사했지만, 옥저와는 또 다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예는 특히 '단궁(짧은 활)', '과하마(키가 작아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다는 말)', 그리고 '반어피(바다표범의 가죽)'를 특산물로 유명했습니다. 이 특산물들은 동예의 자연환경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주변 국가들과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단궁은 그 위력이 뛰어나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동예의 사회는 족외혼(동일한 족(씨족)끼리는 결혼하지 않고, 다른 족과 결혼하는 것)을 엄격히 지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씨족 간의 혈연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부족의 번성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동예에는 '책화(責禍)'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부족 간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거나 타 부족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소나 말 등으로 배상하게 하는 제도로, 부족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책화는 동예 사회의 질서 유지와 분쟁 해결 방식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풍습입니다.

동예인들은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습니다. 무천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추며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빌던 행사였습니다. 이는 동예인들의 신앙심과 공동체 의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로, 고대 부족 국가들의 농경 사회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그림자: 옥저와 동예, 종속의 역사

옥저와 동예는 비록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강력한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옥저는 고구려에 곡물과 특산물을 공납하고, 유사시에는 군사적 지원까지 해야 하는 등 사실상의 종속 관계에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옥저를 직접 지배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통치했는데, 이는 옥저의 풍부한 물산과 전략적 위치를 활용하면서도 직접적인 통치에 따르는 행정적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였습니다. 고구려는 옥저의 읍락 지배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면서, 옥저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했습니다.

동예 역시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옥저보다는 상대적으로 고구려의 간섭이 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지리적으로 옥저보다 고구려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자체적인 방어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동예 역시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 등 완전히 독립적인 국가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고구려는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경제적 압박과 정치적 회유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옥저의 경우, 고구려는 옥저의 소금과 해산물 등의 자원을 필요로 했고, 옥저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군사적 보호가 필요한 부분이 있었기에 이러한 종속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해안가 소국들의 소멸과 역사적 의의

옥저와 동예는 결국 고구려의 세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점차 고구려에 흡수되었습니다. 특히 옥저는 미천왕 때 완전히 고구려에 편입되었으며, 동예 역시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옥저와 동예는 독자적인 국가로서의 역사를 마감하고 고구려라는 거대한 제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비록 옥저와 동예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고구려에 종속되거나 흡수되었지만, 이들은 한반도 고대사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습니다. 그들의 독특한 풍습과 생활 방식은 당시 한반도 북방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한 옥저와 동예의 역사는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역학 관계, 그리고 주변국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나가는 고대 국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 해안가 소국들의 역사는 단순히 사라져버린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고대 한반도의 다채로운 모습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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