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의 귀주대첩,동아시아의 운명을 바꾼 거란 침입 격퇴

 

고려는 건국 이후 북방 민족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특히 거란족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세운 뒤,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고려를 복속시키려 했고, 이는 30여 년에 걸친 세 차례의 고려-거란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길고 힘든 전쟁의 마지막을 승리로 이끌며 고려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 바로 강감찬 장군입니다. 오늘은 강감찬 장군의 활약과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대장정,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거란의 위협과 고려의 대응

거란은 993년(성종 12년) 1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고려는 서희(고려의 외교관)의 뛰어난 외교 담판으로 거란의 침략 의도를 꺾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강동 6주는 흥화진,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 지역을 말합니다.)를 얻어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고려가 약속했던 송나라와의 단교(외교 관계를 끊는 것)를 이행하지 않고 계속 교류하자 1010년(현종 1년) 2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강조(고려의 무신이자 정치가)의 정변(정권을 폭력적으로 바꾸는 사건)을 구실로 삼아 대규모 병력이 고려를 침공했고, 고려는 한때 개경까지 함락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종(고려 8대 임금)이 나주로 피난을 가면서까지 항전을 이어갔고, 결국 거란은 고려가 국왕의 친조(임금이 직접 상대국에 가서 조공을 바치는 것)를 약속하자 철군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과 국왕 친조 요구를 계속했으며, 고려가 이를 이행하지 않자 다시금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거란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외교적 노력을 병행하며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강감찬, 위기의 고려를 구하다

강감찬은 고려의 문신으로, 학문적인 소양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전략가이자 통솔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2차 침입 때 개경을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요직을 거치며 국정 운영에도 깊이 참여했습니다. 거란이 세 번째 침략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려 조정은 강감찬을 상원수(최고 지휘관)로 임명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가 넘는 고령이었지만, 국가의 위기 앞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018년(현종 9년) 12월, 거란의 명장 소배압(거란의 장군)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다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는 이전 침입보다 훨씬 더 큰 규모와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강감찬은 개경 외곽에 나성(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을 쌓는 등 철저한 방어 준비를 지시했고, 자신은 20만 8천여 명의 고려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흥화진과 자주(慈州)에서의 승리

강감찬은 거란군이 고려에 진입하는 길목인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에서부터 치밀한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곳에 좁은 골짜기를 이용해 강물을 막아두었다가, 거란군이 지나갈 때 물길을 터서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또한, 정예 기병을 배치하여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는 거란군의 사기를 크게 꺾고, 그들의 진격을 늦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흥화진에서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은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으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그들을 직접 상대하기보다는, 청야 전술(적군에게 식량과 보급품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물자를 불태우거나 숨기는 전술)을 사용하여 거란군이 식량과 물자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곳곳에 소규모 부대를 배치하여 거란군의 보급로를 끊고 피로하게 만들었습니다. 거란군은 지치고 굶주린 상태로 개경에 도착했지만, 이미 철저하게 방비된 개경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거란군은 더 이상 진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주 대첩,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강감찬은 이때가 결정적인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하며 공격했고, 마침내 귀주(현재 평안북도 구성)에서 거란군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1019년(현종 10년) 2월, 귀주 들판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은 마지막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강감찬은 이곳에 미리 병력을 매복시키고, 강풍이 거란군의 배후에서 불어오도록 전장을 선택하는 등 지형과 기후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중, 강감찬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기병대를 투입하여 지친 거란군의 측면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강풍까지 불어 거란군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고려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추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10만 대군 중 살아 돌아간 병사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대패였습니다. 소배압조차 갑옷을 버리고 도주했을 만큼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이 승리가 바로 한국사에서 길이 빛나는 '귀주 대첩'입니다.

거란의 침입 격퇴와 그 역사적 의의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고려-거란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로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강동 6주 반환이나 국왕 친조를 요구하지 못하게 되었고,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귀주 대첩 이후 고려는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서 송, 거란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강감찬의 활약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를 넘어선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문관으로서 군사를 지휘하여 외침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뛰어난 능력과 애국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의 승리는 고려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이후 개경에 나성을 쌓고, 압록강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국방 체제를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강감찬과 귀주 대첩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고려의 자주 정신과 저력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헌신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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