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서로의 운명을 걸고 동맹을 맺었지만, 대업이 끝난 후에는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했던 사이. 바로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이야기입니다.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둘도 없는 동맹이었던 그들의 관계는 통일 직후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면서 급격히 얼어붙었습니다. 신라는 이제 막 통일한 나라의 명운을 걸고 과거의 동맹이었던 거대 제국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북방에서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발해가 건국되어 당나라와의 관계에 새로운 변수로 떠오릅니다. 오늘은 이처럼 하나의 목표 아래 뭉쳤다가 흩어지고, 또 다른 필요에 의해 다시 손을 잡았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와 발해의 역동적인 대당 관계 변화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피로 맺은 동맹, 칼끝으로 맞서다: 신라의 대당 전쟁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당나라는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신라의 영토에 계림대도독부를, 그리고 옛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군사 행정 기관)를 설치하며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하려는 야욕을 노골화했습니다. 이는 신라에게 있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국통일은 외세의 지배를 받기 위해 이룬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지원하고,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며 당나라에 맞서 전면전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당전쟁입니다. 신라는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당나라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승리를 통해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 세력을 대동강 이남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비로소 자주적인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피를 나누며 맺었던 동맹은 결국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눈 치열한 전쟁을 통해 마무리되었고, 신라는 이 전쟁의 승리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영토를 확고히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실리를 추구한 통일신라와 당
치열한 전쟁이 끝난 후, 놀랍게도 신라와 당의 관계는 빠르게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당나라는 신라의 자주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신라 역시 거대한 제국인 당과 계속해서 척을 지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는 과거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이제는 실리(實際利益)(실제적인 이익)를 바탕으로 한 매우 긴밀한 교류 관계로 전환했습니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상인과 유학생, 승려들이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특히 당나라의 산둥반도 등지에는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新羅坊)이 형성될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신라의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여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장악했을 때, 당나라와의 교역은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최치원과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치는 등 문화적, 학문적 교류도 매우 활발했습니다. 전쟁으로 시작된 양국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서로의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북방의 새로운 강자, 당과 맞선 발해의 등주 공격
신라가 당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무렵, 만주에서는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靺鞨)(만주 동북부 지역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족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했습니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당나라와 긴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있는 지방 정권으로 취급하려 했고, 발해는 이에 강력히 저항하며 독자적인 국가임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 바로 발해 무왕(武王) 시절에 감행된 등주(登州) 공격입니다. 당시 당나라는 발해의 동북쪽에 있던 흑수말갈과 손을 잡고 발해를 남북에서 협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를 간파한 발해의 무왕은 선제공격이라는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의 수군은 바다를 건너 당나라의 산둥반도에 위치한 등주를 기습 공격하여 자사(刺史, 지방 장관)를 살해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는 발해가 결코 당나라에 호락호락하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사건이자, 발해의 강력한 군사력과 기상을 동아시아 전체에 과시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대립을 넘어 교류로, 발해와 당의 화해
등주 공격으로 최악의 관계로 치달았던 발해와 당의 관계는 무왕의 아들인 문왕(文王)대에 이르러 극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계속되는 대립이 양국 모두에게 큰 부담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발해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당나라 역시 안사의 난과 같은 내부 혼란을 겪으며 더 이상 발해와 적대 관계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양국은 화해의 손을 잡고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에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수도의 구조를 당의 장안성처럼 만드는 등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당나라 역시 발해의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한 공식 숙소인 발해관(渤海館)을 수도에 설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발해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의미의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초기의 적대 관계를 극복하고 평화와 교류를 통해 번영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처럼 남북국시대 신라와 발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당나라와의 관계를 설정하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당당하게 꽃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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