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금기를 깬 파격 군주 세조가 선택한 불교 중흥의 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통치 이념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유교'를 떠올릴 것입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아 숭상하고, 고려 시대의 국교였던 불교를 철저히 억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왔습니다. 승려들은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고, 사찰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불교는 부녀자들이나 믿는 미신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슬 퍼런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그것도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국왕이 스스로 불교의 독실한 신자임을 자처하며 대대적인 불교 진흥 정책을 펼쳤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고 흥미롭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피 묻은 칼로 왕좌를 차지한 '세조'입니다. 오늘은 엄격한 성리학의 나라에서 금기를 깨고 불교 중흥의 꽃을 피우려 했던 세조의 파격적인 행보와 그 이면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 합니다.

피의 군주가 짊어진 마음의 짐과 구원을 향한 갈망

세조가 불교에 심취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과 개인적인 고통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수양대군 시절, 그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 수많은 신하를 죽이고, 끝내 친조카인 단종과 친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빚어낸 참혹한 골육상쟁이었습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세조라 할지라도 가족과 신하들의 피를 딛고 선 왕좌가 편안할 리만은 없었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세조는 매일 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침을 뱉으며 저주를 퍼붓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또한 세조는 재위 기간 내내 극심한 피부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온몸에 종기가 나고 고름이 흐르는 이 병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조카를 죽인 대가로 받은 하늘의 벌, 즉 업보(선악의 행위에 따라 받는 운명적인 대가)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유교 성리학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학문이었기에, 세조가 겪는 정신적 불안과 육체적 고통을 위로해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구원을 약속해주지 못했습니다. 죄책감과 공포, 그리고 육체적 고통 속에서 세조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자비와 해탈을 설파하는 불교였습니다. 그는 부처의 힘을 빌려 자신의 죄를 씻고, 병을 치료하며,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왕명으로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다

세조의 불교 진흥 정책 중 가장 눈부신 업적은 바로 간경도감(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국가 기관)의 설치입니다. 세조 7년(1461년)에 설치된 이 기구는 국가 주도로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유교 국가에서 왕이 직접 나서서 불교 서적을 찍어낸다는 것은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조는 "불교의 좋은 말씀을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명분으로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간경도감에서는 '능엄경', '법화경', '금강경' 등 주요 불교 경전들이 우리말인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되었습니다. 이를 '언해불전'이라고 합니다. 이 작업에는 신미 대사, 수미 대사 등 당대 최고의 고승들과 유학자 윤사로, 황수신 등이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조가 직접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교정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버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불교 보급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불경을 백성들이 읽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바꿈으로써, 불교의 대중화를 꾀함과 동시에 창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한글이 널리 퍼지고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불교를 위한 정책이 결과적으로 우리글의 발전을 이끈 셈이니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도성 한복판에 우뚝 선 원각사와 십 층 석탑

조선 시대에는 한양 도성 안에 절을 짓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태조 때 지어진 흥천사 등이 있었지만, 억불 정책이 강화되면서 도성 내 사찰들은 점차 사라지거나 쇠락해 갔습니다. 그런데 세조는 이러한 금기를 깨고 도성 한복판, 지금의 서울 종로 탑골공원 자리에 거대한 사찰인 '원각사'를 창건했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던 곳인데, 세조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조선 왕실의 원찰(왕실의 안녕을 비는 절)로 삼았습니다.

원각사의 창건은 단순히 절 하나를 짓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교적 질서로 짜인 한양의 중심부에 불교의 상징을 세우는 것은 신권에 대한 왕권의 정면 도전이자, 유교 이념을 뛰어넘는 강력한 군주권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세조는 원각사에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하고 웅장한 '10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이 탑은 기존의 조선 석탑과는 달리 고려 시대의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이국적이고 화려한 조형미를 자랑합니다. 당시 수만 명의 인력과 막대한 재정이 투입된 대공사였습니다. 신하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짠다"며 극렬히 반대했지만, 세조는 "부처님의 은덕으로 나라를 평안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공사를 강행했습니다. 원각사 낙성식 날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올랐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로, 세조는 이 사찰에 각별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승려의 지위를 회복하고 사찰을 보호하다

세조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책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불교를 보호하려 노력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도첩제(승려가 되기 위해 나라에서 허가증을 발급받게 하던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상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이 제도를 완화하여 승려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습니다. 또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승려들을 구제하고, 군역이나 잡역에 동원되는 승려들의 부담을 줄여주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전국의 주요 사찰을 중수하고 지원하는 데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와 월정사,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 등은 세조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중창되었습니다. 특히 상원사는 세조와 얽힌 전설로 유명합니다. 피부병 치료를 위해 상원사를 찾은 세조가 계곡에서 목욕할 때, 문수보살이 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등을 밀어주어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객이 숨어 있는 것을 고양이가 알려주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 내려오며 세조의 불교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됩니다. 세조는 고마움의 표시로 상원사에 고양이 석상을 세우고 토지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자들의 반발과 왕권 강화의 정치학

세조의 친불교 정책은 당연히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 관료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집현전 학사 출신들을 비롯한 신하들은 "불교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오랑캐의 법"이라며 상소를 올리고 통곡했습니다. 그들에게 불교 진흥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조는 이러한 반대를 강력한 왕권으로 찍어 눌렀습니다. 그는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고,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니 둘 다 필요하다"는 논리로 신하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세조의 불교 진흥이 단순한 신앙심을 넘어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세조는 왕권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견제하려는 신권(양반 관료 세력)을 누르기 위해, 유교가 아닌 제3의 이념적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왕실의 안녕을 빌고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는 불교는 왕의 권위를 신성하게 만들고, 유교적 명분에 얽매인 신하들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습니다. 즉, 불교는 세조에게 있어 마음의 위안이자, 강력한 절대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파트너였던 셈입니다.

짧았던 중흥, 그러나 길게 남은 문화적 유산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의 불교 진흥 정책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성종 대에 이르러 다시 유교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간경도감은 폐지되었고, 도첩제는 더욱 엄격해졌으며, 원각사는 연산군 때 기생들의 놀이터로 변질되었다가 결국 불타 없어지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조선은 다시 철저한 숭유억불의 사회로 돌아갔습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세조의 불교 정책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 세조가 남긴 유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간경도감을 통해 간행된 수많은 언해 불경들은 국어학 연구에 있어 보물과도 같은 자료가 되었고, 한글이 백성들 사이 깊숙이 파고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상원사 동종, 그리고 그가 남긴 수많은 불교 설화들은 조선 전기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재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획일적인 유교 사회에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정책으로 구현하려 했던 군주의 의지는 역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

오늘 우리는 세조의 불교 진흥 정책을 통해, 피의 군주라는 차가운 가면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의 고독과 번민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정작 그 마음은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었던 세조. 그에게 불교는 어쩌면 왕관의 무게를 버티게 해 준 유일한 지팡이였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그가 꿈꾸었던 불국토(부처가 사는 깨끗하고 이상적인 세계)는 조선 땅에 영원히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문화적 자취는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은은한 목탁 소리처럼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그 승자가 남긴 고뇌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것 또한 역사를 이해하는 깊이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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