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즐겨 먹는 반찬 중에 '숙주나물'이 있습니다. 아삭아삭한 식감이 일품이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금방 쉬어버려 맛이 변하기 일쑤인 나물입니다. 그런데 이 나물의 이름이 조선 시대의 한 역사적 인물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세조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이자 조선 전기 최고의 천재 관료로 손꼽히는 '신숙주'입니다. 백성들이 그의 변절을 미워하여, 쉽게 맛이 변하는 녹두나물에 그의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이라 불렀다는 야사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변절자라고만 치부하기에는 그가 조선 역사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나 거대하고 선명합니다. 세종대왕이 가장 아꼈던 언어 천재에서, 친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피의 군주 세조의 손을 잡은 현실 정치가로 변모한 신숙주. 오늘은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세조의 시대를 어떻게 이끌어갔는지 그 뜨거운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세종이 아낀 집현전의 보배이자 언어의 마술사
신숙주의 젊은 시절은 그야말로 '엄친아'의 정석이었습니다. 그는 세종대왕이 인재 양성을 위해 만든 집현전(조선 세종 때 설치한 학문 연구 기관)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함께 공부했던 성삼문, 박팽년 등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수재로 불렸습니다. 특히 신숙주는 언어적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중국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등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하여 훗날 조선 외교의 중심축이 됩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신숙주의 역할은 지대했습니다. 그는 세종의 명을 받아 성삼문과 함께 요동(중국 랴오닝성 지역)을 무려 13번이나 오갔습니다. 당시 요동에 유배 와 있던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 훈민정음의 소리 체계를 완벽하게 다듬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의 뜻을 받들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했던 청년 신숙주의 열정은 세종을 감동시켰고, 세종은 문종과 어린 손자 단종을 그들에게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신숙주를 깊이 신뢰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전형적인 선비였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수양대군의 손을 잡다
운명은 얄궂게도 신숙주에게 잔혹한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 늙은 대신들이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왕권은 약해졌고, 신권이 비대해지면서 국정 운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야망에 불타는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등장합니다. 수양대군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꿈꾸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성삼문과 박팽년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선왕(세종,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단종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파'와, 무너진 왕권을 바로 세우고 실질적인 국가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현실파'였습니다. 신숙주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는 늙은 대신들이 좌지우지하는 무기력한 조정보다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수양대군이 조선을 이끌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을 일으켰을 때, 신숙주는 직접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수양대군의 참모로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알리는 교서를 작성하고 사후 처리를 도맡았습니다. 어제의 동지였던 김종서가 철퇴에 맞아 죽고, 조선의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가는 그 밤, 신숙주는 학자의 붓 대신 정치가의 길을 선택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육신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비극은 정점으로 치닫습니다. 단종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집현전의 옛 동료들이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 즉 사육신(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 사건이 발생합니다. 국문(죄인을 심문함) 장소에서 성삼문은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며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뜨거운 불로 살을 지지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세조의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바로 신숙주였습니다. 성삼문은 신숙주를 노려보며 "너는 세종 대왕께서 어린 손자를 부탁하신다는 말씀을 잊었느냐"라고 호통쳤다고 전해집니다. 친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신숙주는 침묵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신숙주는 백성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앞서 언급한 숙주나물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숙주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상적인 의리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군주를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충성이라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조선 최고의 외교관이자 국방 전략가로서의 면모
도덕적인 비난과는 별개로, 관료로서 신숙주의 능력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세조는 그를 "나의 위징(중국 당 태종을 보필한 명재상)이다"라고 부르며 극진히 아꼈습니다. 신숙주는 세조 시대를 통틀어 영의정 등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며 국정 전반을 총괄했습니다. 특히 그의 진가가 드러난 분야는 외교와 국방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을 직접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일본과 류큐의 지리, 역사, 사절 접대 등을 기록한 책)라는 불후의 역작을 남겼습니다. 이 책은 당시 일본의 지세, 국정, 교섭 방법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이후 조선의 대일 외교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성리학자들은 보통 오랑캐라며 주변국을 무시했지만, 신숙주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일본과 평화를 유지해야 조선이 안전하다"는 그의 지론은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의 평화를 지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그는 북방의 여진족 토벌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세조와 함께 함길도 지역을 순시하며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군사 전략을 수립하여 북방 영토를 안정시키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붓을 든 선비였지만, 국가의 안보가 걸린 문제 앞에서는 누구보다 냉철한 전략가였던 것입니다.
세조의 독주를 막고 균형을 잡으려 했던 재상
세조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군주였지만, 그만큼 독단적이고 다혈질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감히 왕의 말에 토를 달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신숙주는 달랐습니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믿고 할 말은 하는 강단 있는 신하였습니다. 술자리에서 세조가 흥에 겨워 실수를 하거나 과도한 형벌을 내리려 할 때면, 신숙주는 목숨을 걸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세조가 술에 취해 신숙주의 팔을 세게 비틀며 "네가 평소에 내 말을 잘 듣지 않으니 괘씸하다"라고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숙주 역시 세조의 팔을 잡아비틀며 "전하께서도 제 말을 듣지 않으시니 저 또한 그렇습니다"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는 신숙주가 단순히 권력에 아부하는 간신이 아니라, 왕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정을 논의하는 동반자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세조의 강력한 왕권이 폭주하지 않도록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의 시스템을 안정시켰습니다.
경국대전 편찬과 문물제도의 정비
세조가 꿈꾸었던 법치 국가의 완성에도 신숙주의 손길이 닿아 있습니다. 그는 세조의 명을 받아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편찬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비록 완성은 성종 때 이루어졌지만, 그 기틀을 닦은 것은 세조와 신숙주였습니다. 이 외에도 '국조오례의', '동국통감' 등 조선 전기의 중요한 편찬 사업에는 거의 빠짐없이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신숙주는 세조가 죽은 후에도 예종과 성종을 보필하며 원로(오래되어 경험이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로서 국가의 중심을 잡았습니다. 특히 어린 성종이 즉위했을 때는 섭정을 맡아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무려 4명의 왕을 모시며 조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그의 정치적 수완과 행정 능력은 조선 역사상 으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사의 회색지대에서 신숙주를 다시 보다
1475년, 신숙주가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조회를 멈추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는 유언으로 "일본과 화친을 잃지 마소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경세가(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정치가)다운 최후였습니다.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극명하게 갈립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권력을 좇은 변절자라는 비판과, 탁월한 능력으로 혼란기의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위대한 재상이라는 찬사가 공존합니다. 만약 그가 사육신과 함께 죽음을 택했다면, 조선은 충신 한 명을 더 얻었을지 모르지만, '해동제국기'나 안정적인 대일 외교, 그리고 노련한 국정 운영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사는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숙주는 자신의 명예를 버리는 대신, 현실 속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한 실리를 택했습니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숙주나물처럼 쉽게 변했다는 조롱 뒤에 숨겨진, 치열하게 시대를 고민하고 조선을 경영했던 천재 관료 신숙주의 진짜 얼굴을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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