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삭둥이에서 왕을 만든 킹메이커 권력의 화신 한명회

서울의 핫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압구정. 화려한 명품 거리와 세련된 건물들이 즐비한 이곳의 이름이 조선 시대 한 사람의 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세를 누렸던 정치가이자, 수양대군을 왕(세조)으로 만든 일등 공신 '한명회'입니다. 그는 칠삭둥이(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일곱 달 만에 태어난 아이)라는 신체적 약점과 불우한 처지를 딛고 일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왕을 갈아치우고 천하를 호령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로 음흉한 책략가로 묘사되곤 하는 한명회. 오늘은 그가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계유정난'이라는 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거대했던 권력의 끝은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보잘것없는 문지기 세상을 뒤엎을 야망을 품다

한명회의 시작은 실로 초라했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 뱃속에서 일곱 달 만에 태어난 탓에 몸이 매우 허약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태어났을 때 마치 덩어리 같아서 집안 어른들이 버리려 했으나, 늙은 여종이 거두어 솜에 싸서 키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자라면서도 그는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서른여덟 살이라는 늦은 나이가 될 때까지 뚜렷한 관직 없이 지내다가, 겨우 얻은 자리가 개성 경덕궁의 '경덕궁직'이라는 말단 관리직이었습니다. 이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야망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하급 관리였지만, 당시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 등 원로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자, 왕실의 종친인 수양대군이 이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입니다. 한명회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에게 접근했습니다. 수양대군은 한눈에 한명회의 비범함을 알아보았습니다. 겉모습은 초라한 문지기였지만, 그 눈빛과 담대함은 천하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야심가의 만남, 이것이 조선 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든 태풍의 눈이 되었습니다.

살생부를 쥐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날 밤

"나에게는 장자방(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책사)이 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머리가 되어 치밀하게 쿠데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무사들을 은밀히 포섭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거사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1453년 10월, 계유정난의 밤이 밝았습니다. 이날 밤의 주인공은 단연 한명회였습니다. 그는 미리 작성한 살생부(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를 손에 쥐고 궁궐 문 앞에 섰습니다.

김종서가 철퇴를 맞고 쓰러진 후, 조정의 대신들이 왕의 부름을 받고 허겁지겁 궁으로 들어왔습니다. 한명회는 문을 굳게 지키며 들어오는 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습니다. 살생부에 이름이 적힌 자는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무사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자는 죽여라!", "이 자는 살려라!" 그의 손짓 하나에 조선 최고 권력자들의 생사가 갈렸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그날 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이후 세조 정권 내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왕을 뛰어넘는 권세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다

세조가 즉위한 후 한명회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는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격),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정 운영을 주도했습니다. 세조는 의심이 많은 군주였지만, 한명회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심지어 사육신 사건 등으로 수많은 신하가 죽어 나갈 때도 한명회는 세조의 옆을 지키며 정권을 보위했습니다. 그는 정보 정치의 대가였습니다. 곳곳에 심어둔 정보원들을 통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반역의 기미는 없는지 샅샅이 감시했습니다.

한명회의 권력 기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것은 바로 '혼맥 정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왕실과 결혼시켜 왕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셋째 딸은 예종의 왕비(장순왕후)가 되었고, 넷째 딸은 성종의 왕비(공해왕후)가 되었습니다. 두 명의 딸을 왕비로 만들고, 두 명의 왕을 사위로 둔 것입니다. 특히 세조가 죽고 예종이 일찍 사망한 뒤, 어린 성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한명회의 입김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어린 왕 성종을 대신해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왕이 어릴 때 대비가 뒤에서 정치를 돕는 일)을 할 때, 실제적인 결정권은 한명회를 위시한 **훈구파(세조의 집권을 도운 공신 세력)**들에게 있었습니다. "한명회의 집 앞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줄이 구름처럼 이어졌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그의 권세는 왕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압구정에서 즐긴 풍류와 채워지지 않는 욕망

한명회는 권력의 정점에서 한강 변에 아름다운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압구정'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압구정은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으로, 벼슬을 버리고 강가에서 유유자적하게 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권력에 집착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가 자연과 벗하며 욕심 없이 살겠다는 이름을 붙였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압구정은 풍류를 즐기는 은둔의 장소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사교장이자 로비의 본산이었습니다. 중국 사신이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최고급 연회장이기도 했습니다. 한명회는 이곳에서 늙어서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습니다. 성종 때에 이르러 자신이 늙어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국정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심지어 왕실 소유의 정자만 쓸 수 있는 용무늬 기와를 압구정에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성종의 눈 밖에 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노정객의 오만이었습니다.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쓸쓸한 말년

달도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절대 권력을 누리던 한명회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성종이 성장하면서 할아버지뻘인 훈구 대신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종은 김종직을 비롯한 지방의 젊은 선비들, 즉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의명분과 도덕성을 중시하는 사림파에게 한명회는 타도해야 할 부패한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림파의 끊임없는 탄핵 상소와 성종의 견제 속에 한명회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압구정에서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평생을 권력 투쟁의 최전선에서 살았던 그에게 찾아온 적막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1487년, 한명회는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4명의 왕을 모시며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거인의 조용한 퇴장이었습니다.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었지만, 이는 전직 원로 대신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습니다.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부관참시의 비극

한명회의 비극은 그가 죽은 뒤에 찾아왔습니다. 연산군 시대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문입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처벌했는데, 당시 고위 관료였던 한명회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이미 죽은 사람이었지만, 연산군의 분노는 무덤 속에 있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한명회의 무덤은 파헤쳐졌고, 시신의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이미 죽은 사람의 죄를 물어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베는 형벌)를 당했습니다. 잘린 머리는 저잣거리에 내걸려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나의 손안에 천하가 있다"라고 자부했던 천하의 한명회가 죽어서 그토록 처참한 꼴을 당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훗날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에야 그의 신원은 복원되었지만, 이는 '권불십년(권세는 10년을 가지 못한다)'이라는 옛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기억하는 두 가지 얼굴

한명회는 조선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한쪽에서는 그를 탁월한 처세술과 정치 감각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세조의 부국강병 정책을 뒷받침한 유능한 행정가이자 재상으로 평가합니다. 그는 국방을 튼튼히 하고, 행정 구역을 정비하는 등 조선 전기의 기틀을 다지는 데 분명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왕권을 사유화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간신이자 권력의 화신으로 비판합니다. 그가 만든 훈구 정치는 훗날 조선 정치를 부정부패로 얼룩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압구정 거리를 걸으며 화려함을 느낄 때, 문득 그 이름의 주인이었던 한명회를 떠올려 봅니다. 칠삭둥이 문지기에서 왕의 장인이자 킹메이커로, 그리고 부관참시의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끝난 그의 파란만장한 삶. 그것은 권력이라는 달콤한 사탕이 얼마나 위험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욕망의 끝에서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한강을 바라보며 지은 정자 압구정에는 여전히 그의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서려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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