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전개 과정 기미독립선언서 발표와 온 민족이 하나 되어 외친 자유의 함성

 

봄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던 백여 년 전의 어느 날, 이 땅의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고 맑았습니다. 하지만 그 푸른 하늘 아래를 걸어 다니던 우리 선조들의 가슴속에는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한숨과 눈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총칼 아래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지 어느덧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반도는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는 삭막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삼엄한 군사경찰의 감시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결코 주저앉아 울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을 향한 갈망이 더욱 커지듯, 가슴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자유와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망은 마침내 거대한 용암처럼 폭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화적이면서도 위대했던 민족적 저항인 삼일운동 전개 과정은 과연 어떻게 시작되어 한반도 전체를 불태웠을까요. 고등학생 여러분의 눈높이에서 그 뜨거웠던 역사의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되짚어 보며, 기미독립선언서에 담긴 숭고한 정신과 온 민족이 손에 손을 잡고 외쳤던 만세 시위의 감동적인 실체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피어난 독립의 불씨와 만세 시위의 배경

우리가 삼일운동 전개 과정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국제 정세의 변화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구백십팔년 세계 제일차 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전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는 전 세계 식민지 피압박 민족들에게 거대한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비록 이 원칙이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었다 할지라도, 오랜 암흑기를 겪던 조선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어설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외에 머물던 독립운동가들이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이어서 천구백십구년 이월 팔일,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외친 이팔 독립 선언은 국내의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자극을 주었습니다. 적국의 수도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을 외치는데, 본국에 있는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부끄러움과 사명감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와 독살설은 일제에 대한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범민족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민족대표 삼십삼인의 결성과 종교계 및 학생들의 비밀스러운 연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일제의 삼엄한 헌병경찰제도 아래에서 대규모 시위를 기획하는 것은 발각되는 즉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종교와 이념의 벽도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천도교를 이끌던 손병희를 중심으로 기독교계의 이승훈, 불교계의 한용운 등 각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전격적으로 손을 잡았습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우는 민족대표 삼십삼인입니다.

민족대표들은 학생들과도 긴밀하게 유통망을 구축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등을 다니던 청년 학생들이 시위의 실무적인 기획과 행동대장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깊은 밤마다 비밀리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일 장소를 선정하고, 전국의 주요 도시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할 연락책을 지정했습니다. 거사를 삼월 일일로 정한 이유도 고종 황제의 인산일(태상황이나 황제의 장례식을 이르는 말)을 맞아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서울로 모여들 유효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철저한 보안과 민족적 연대 속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뒤바꿀 거대한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에 선포한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

시위의 정당성을 안팎으로 선언하기 위해 가장 중요했던 작업은 바로 독립선언서의 작성이었습니다. 이 중대한 임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육당 최남선에게 맡겨졌습니다. 최남선은 밤을 지새우며 문장 하나하나에 민족의 혼과 독립의 당위성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글이 바로 삼일운동 전개 과정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기미독립선언서입니다. 이 선언서는 감정적인 원망이나 보복을 외치는 대신, 인도주의(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인류의 복지를 실현하려는 사상)와 평화에 기반하여 조선이 당당한 자주독립국임을 엄숙히 선포하는 고결한 문장들로 채워졌습니다.

선언서가 작성된 후에는 이를 대량으로 찍어내어 전국에 배포하는 목숨을 건 인쇄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의 사장 이종일은 일제 순사의 갑작스러운 검문을 기지로 모면해가며, 어두운 지하실에서 숨을 죽인 채 약 이만 오천 장의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해 냈습니다. 이렇게 인쇄된 선언서들은 어린 학생들의 교복 자락과 보따리 속에 숨겨져 기차를 타고 평양, 원산, 의주, 대구 등 전국의 거점 도시로 신속하게 운반되었습니다. 활자 하나하나에 맺힌 조국의 미래가 전국 각지의 민중들에게 배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탑골공원의 함성과 태화관에서 시작된 역사적 운명의 날

마침내 천구백십구년 삼월 일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서울 탑골공원에는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농민들과 붉은 가슴을 지닌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민족대표 삼십삼인이 공원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야 했지만, 시위가 혹시라도 폭력 사태로 번져 어린 학생들이 다칠 것을 우려한 민족대표들은 인근의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하여 그들만의 독립 선언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자진해서 일제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체포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지도자들이 나타나지 않자 탑골공원에 모인 대중은 잠시 술렁였습니다. 그때 군중 속에서 정재용이라는 한 청년 학생이 결연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품속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꺼내어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는 첫 구절이 공원에 울려 퍼지는 순간, 모여 있던 수천 명의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낭독이 끝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은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공원을 뛰쳐나와 종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십 년 동안 억눌렸던 침묵을 깨부수는 위대한 함성의 시작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시골 마을까지 삼단계로 확산된 삼일운동 전개 과정

서울에서 타오른 만세 시위의 불길은 멈추지 않고 요들송처럼 메아리치며 전국의 강산을 뒤흔들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보통 삼일운동 전개 과정을 세 단계의 확산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제일단계는 삼월 초순으로, 서울과 평양, 원산 등 기차역이 있고 독립선언서가 빠르게 전달된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주로 학생과 종교인들이 주도하여 비교적 평화적인 가두시위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이단계는 삼월 중순부터 하순까지로, 불길이 중소도시와 장터로 번져나간 시기입니다. 장날을 맞아 모여든 수많은 농민과 상인, 노동자들이 시위의 주인공으로 등장했습니다. 장터에 모인 민중은 태극기를 나누어 들고 헌병경찰의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삼단계는 사월 이후로, 시위가 깊은 산골 마을과 농촌 지역까지 완전히 확산된 단계입니다. 이 시기에는 일제의 무자비한 유혈 진압에 분노한 농민들이 헌병 주재소나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적극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일제는 이 거대한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했으나, 이미 전 민족의 가슴속에 번진 불길을 끌 수는 없었습니다.

헌병경찰의 잔혹한 탄압과 제암리 학살 사건의 가슴 아픈 비극

일제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벌이는 조선의 민중을 향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들은 비무장 상태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칼을 휘둘러 무고한 사람들의 팔다리를 자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우내 장터의 유관순 열사도 이 시기 천안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지하 감옥의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독립을 외치다 십대의 어린 나이에 순국하셨습니다.

특히 천구백십구년 사월 십오일 경기도 수원군에서 발생한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일제의 잔혹성을 전 세계에 폭로한 대표적인 만행이었습니다. 일제 군경은 만세 시위가 격렬했던 제암리 마을의 성인 남성들을 교회 안에 모이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뒤 교회 주변을 포위하고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질렀으며, 불길을 피해 탈출하려는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까지 총으로 쏘아 죽이고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이 끔찍한 학살은 캐나다의 선교사 스코필드에 의해 사진과 보고서로 기록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고, 일제 식민 지배의 야만적인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세계를 깨운 민족적 유산

삼일운동 전개 과정은 비록 그 자리에서 즉시 조국의 광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위대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첫째로, 이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끌어갈 중심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 결과 삼일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천구백십구년 사월,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공화정의 이념이 마침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 정부라는 결실로 맺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일제의 통치 방식을 변화시켰습니다. 칼을 차고 조선인을 때리던 무단 통치로는 더 이상 한반도를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달은 일제는, 겉으로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는 듯한 문화 통치로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일운동은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선 조선 민중의 용기 있는 저항은 중국의 오사 운동과 인도의 무저항 반일 운동 등 아시아 전역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거대한 영감을 주며 세계사적 연대의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당한 민주 시민으로서 민주주의(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제도)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백여 년 전 차가운 거리에 서서 피를 흘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이름 모를 선조들의 위대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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