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 운동과 순종 서거, 꺼지지 않는 독립의 불꽃과 1920년대 학생 중심의 항일 투쟁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교실 창밖의 풍경이나 친구들과 나누는 소박한 일상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한 평화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와 비슷한 나이의 청소년들과 장병들이 마주했던 현실은 눈물과 분노로 가득 찬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만세 소리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의 서거를 슬퍼하는 통곡인 동시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두 번째 전민족적 거사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역사 교과서나 모의고사에서 31 운동은 깊게 기억하지만 610 만세 운동은 상대적으로 짧게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감시 속에서 대중이 아닌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낸 경이로운 사건이었습니다. 화려한 무기나 군대 대신 가슴속에 숨겨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들고 일제의 침탈에 맞섰던 그 뜨거웠던 항일 투쟁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날의 감동과 역사적 진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서거와 민족의 깊은 슬픔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2대 황제였던 순종이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순종의 서거 소식은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나라는 빼앗겼지만 나라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황제의 죽음은 조선의 한 시대가 완전히 저물었다는 서글픈 현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궁궐 앞으로 모여들어 눈물을 흘렸고 전국 각지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독립운동가들과 학생들은 이 거대한 민족적 슬픔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1919년 고종 황제의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던 31 운동의 위대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순종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기회로 삼아 다시 한번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킨다면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일제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황제의 죽음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웅크려 있던 독립의 불꽃을 다시 피워 올리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일제의 철저한 삼엄한 경계망과 지하에서 싹튼 비밀 계획

31 운동을 거치며 큰 교훈을 얻었던 일제 조선총독부 역시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순종 서거 직후부터 그들은 제2의 31 운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순종의 인산일을 전후해 서울 시내 전체에 엄청난 수의 군인과 경찰을 배치하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즉각 체포하는 등 숨 막히는 감시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독립의 열망은 지하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초기 계획은 천도교 세력과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 진영이 연대하여 추진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밀리에 동지들을 모으고 대규모 만세 시위를 기획했습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일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고 인쇄 중이던 독립선언서가 압수당하는 치명적인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주도 세력이 와해되면서 민족적 거사는 이대로 무산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불꽃이 다른 곳에서 타오를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선 학생들과 치밀했던 독립 만세 준비

일제의 탄압으로 기성 독립운동 세력이 주춤한 사이 역사의 전면에 당당히 나선 이들이 바로 학생들이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서울 시내의 여러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직감했습니다. 그들은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이선호, 연희전문학교의 이병립 등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학생 조직을 가동했습니다.

학생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밤마다 비밀 요새에 모여 토산품 애용 운동이나 독서회 모임으로 위장한 채 거사를 기획했습니다. 그들은 각 학교의 대표들을 연결하는 치밀한 연락망을 구축했고 수천 장의 격문과 태극기를 직접 손으로 그리고 등사기(판에 구멍을 뚫어 잉크를 밀어내며 인쇄하는 기계)를 돌려 찍어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가장 허술한 틈을 타 격문을 숨겨 나르고 동료 학생들을 포섭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첩보 작전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610 만세 운동은 기성세대의 좌절을 극복하고 순수한 청년 학생들의 주도 아래 더욱 단단하고 구체적인 항일 투쟁으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종로 거리를 뒤흔든 청년들의 사자후

마침내 역사적인 1926년 6월 10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순종의 상여가 창덕궁을 출발하여 돈화문을 지나 종로 삼가 벌판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거리는 이미 황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수십만 명의 애도 인파와 이를 감시하는 일본 경찰들로 인산인해(사람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는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던 오전 여덟 시 삼십 분경 단성사 앞 로터리에서 마침내 기다리던 신호가 떨어졌습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이선호의 힘찬 외침을 시작으로 주위에 숨어 있던 수많은 학생들이 품속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꺼내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조선 독립 만세"라는 거대한 함성이 종로 하늘을 찔렀습니다. 일본 경찰들이 당황하여 칼을 빼 들고 달려들었지만 학생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격문을 뿌리며 전진했습니다. 시위는 상여의 이동 경로를 따라 청량리와 훈련원 등 서울 시내 8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평범한 시민들도 학생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가슴이 뜨거워져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 통치라는 교묘한 기만책에 속아 잠들어 있던 민족의 정기가 청년 학생들의 사자후(사자의 부르짖음이라는 뜻으로 크게 외치는 당당한 목소리)를 통해 다시 한번 천하에 선포된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념의 벽을 허물고 민족 유일당 운동의 초석을 다지다

610 만세 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의의 중 하나는 바로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연대와 대통합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1920년대 독립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서로의 방법론을 비판하며 깊은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일제와 싸우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종교 단체, 그리고 이념을 초월한 순수한 청년 학생들이 오직 국권 회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손을 맞잡았습니다. 비록 일제의 사전 검거로 완벽한 연합 전선이 폭발하지는 못했지만 두 세력이 힘을 합쳐 거대한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우리가 뭉쳐야만 일제를 이길 수 있다는 뼈저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이는 이듬해인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합쳐 결성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항일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의 출범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는 다리를 학생들이 놓아준 셈입니다.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과 살아남은 자들의 뼈아픈 시련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일제의 보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현장에서 무차별적인 몽둥이찜질과 칼부림으로 학생들을 진압한 일본 경찰은 서울 시내의 모든 학교를 포위하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습니다. 시위에 가담했거나 격문을 소지한 학생들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1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포되어 차가운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주동자로 지목된 이선호, 이병립 등 수십 명의 학생 지도자들은 모진 고문(죄를 자백하게 하려고 육체적 고통을 주는 일)을 당한 후 재판에 넘겨져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정든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일부 학교는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이러한 서슬 퍼런 탄압도 학생들의 꺾이지 않는 기개를 완전히 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학생들은 단식 투쟁으로 맞섰고 학교에 남은 학생들은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전개하는 등 투쟁의 형태를 바꾸어 나가며 일제의 식민 지배에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꺼지지 않는 청년들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610 만세 운동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를 지탱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3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훗날 1929년에 일어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면서 학생들이 항일 민족 운동의 당당한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외쳤던 만세 소리는 나라를 잃은 어둠 속에서도 교육과 실력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청년들의 준엄한 선언이었습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시험 문제를 맞히기 위해 연도와 사건 이름을 암기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100년 전 우리와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차가운 종로 길바닥에서 태극기를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 마주 섰을 때 느꼈을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했던 그 숭고한 용기를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이름 없는 수많은 학생들의 피와 눈물 위에서 피어난 소중한 결과물입니다. 그 청춘들이 남겨준 꺼지지 않는 독립의 불꽃을 가슴 깊이 새기고 미래의 대한민국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마주하는 우리 모두의 가장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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