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진실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 한 뜨거웠던 실력 양성 운동의 역사

우리가 매일 등하교를 하며 마주하는 학교와 교실은 오늘날 당연한 일상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리 선조들에게 배움이란 목숨만큼이나 간절하고 눈물겨운 꿈이었습니다. 당시 나라를 빼앗긴 슬픔 속에서도 한 민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오직 교육뿐이라고 믿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1920년대 전개되었던 민립 대학 설립 운동입니다.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소박하면서도 거대한 구호 아래 온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던 이 운동은 단순한 모금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교묘한 우민화 교육에 맞서 우리만의 최고 교육 기관을 만들고 이를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장엄한 경제이자 문화적 저항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나 수능 모의고사에서 실력 양성 운동의 핵심 파트로 자주 접했을 이 사건은 당시 지식인들과 평범한 민초들이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보여주는 소중한 이정표입니다. 총칼 대신 펜과 책을 들고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그 뜨거웠던 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날의 감동과 뼈아픈 한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2차 조선교육령의 기만과 식민지 우민화 정책의 현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왜 일어났는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일제가 시행하던 냉혹한 식민지 교육 제도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1919년 31 운동이라는 전민족적인 저항에 깜짝 놀란 일제는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교묘한 방식으로 지배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인들에게도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 기회를 주겠다고 선전하며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늘리고 고등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는 듯한 시늉을 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 민족이 똑똑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철저한 우민화(백성을 어리석게 만듦) 정책에 불과했습니다. 일제는 한국인들이 고등 지식을 배우고 비판적 사고를 갖추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이에 따라 실업 교육이나 초등 교육 위주로만 제도를 편성했고 한국인들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의 설립은 법적으로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수많은 청년들이 더 깊은 학문을 배우고 싶어도 국내에는 갈 수 있는 대학이 단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차별적 현실은 한국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거대한 분노와 위기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른 나라의 손에 우리 민족의 교육을 맡겨둘 수 없으며 우리 손으로 직접 최고 학부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절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와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출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1920년대 초반부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대학을 우리 힘으로 세우자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1922년 이상재, 이승훈, 조만식 등 당대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인 1923년 3월 마침내 서울에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 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순수한 우리 민족의 자본과 역량으로 종합 대학을 설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실력 양성 운동의 일환으로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내건 모금 구호는 당시 전국의 모든 동포들의 심장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슬로건은 신분과 빈부를 떠나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거대한 민족적 과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연대감을 심어주었습니다. 1원이라는 돈은 당시 가난한 서민들에게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자식 세대에게만큼은 차별 없는 최고의 교육을 물려주고 싶다는 부모들의 염원이 담기며 모금 운동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확산된 교육 자립을 향한 온 겨레의 열망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중앙 조직이 서울에 들어선 이후 지방 곳곳에서도 자발적인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전국의 주요 도시와 군 단위까지 수백 개의 지방 지회가 순식간에 조직되었고 이는 남녀노소와 계층을 초월한 거민적(온 주민이 한마음으로 참여함)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밴드나 선전대를 조직하여 거리로 나섰고 농민들은 수확한 곡식의 일부를 기부했으며 시장의 상인들은 하루 판매 수익금 전체를 기탁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이 운동의 불길이 한반도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 멀리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이고 태평양 건너 미국 하와이와 서구 사회에 정착한 동포들까지 고국의 대학 설립 소식을 듣고 피땀 흘려 모은 귀중한 자금을 보내왔습니다. 돈이 없는 이들은 자신이 아끼던 패물을 기부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 교육 기관을 건설하겠다는 이 거대한 에너지는 일제 통치자들에게 무력시위보다 더 무서운 문화적 저항이자 민족적 결속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대학 설립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서로의 손을 가장 단단하게 맞잡는 값진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재해의 아픔과 경제적 빈곤이 가져온 모금 활동의 커다란 제동

그러나 온 겨레의 뜨거운 성원 속에서 힘차게 출발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와 혹독한 경제적 시련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한반도 전역을 덮친 연이은 대홍수와 극심한 가뭄은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수많은 한국인 서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당장 하루 한 끼의 식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계가 위협받는 상황이 지속되자 민족의 미래를 위한 대학 설립 기금 모금은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 상인과 기업가들은 자본력이 턱없이 부족한 영세한 상태였습니다. 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자본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야 했는데 일제의 경제적 수탈 속에서 자생력을 잃어버린 민족 자본의 크기는 이러한 거대한 프로젝트를 온전히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돈을 기부하고 싶어도 기부할 돈이 없는 절대적 빈곤의 상태가 지속되면서 초기 확신에 찼던 모금 열기는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이상과 열정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식민지 조선의 피폐한 경제적 현실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운동의 추진력은 급격하게 떨어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경성제국대학 설립이라는 일제의 집요하고 영악한 방해 공작

물산 장려 운동과 더불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확산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일제 조선총독부 역시 이를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한국인들이 직접 대학을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민족 지도자들이 결집하는 것을 식민 지배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하지만 전 민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합법적인 모금 운동을 무력으로 무조건 탄압하기에는 대내외적인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일제는 매우 영악하고 교묘한 방해 공작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대학을 세우기 전에 일제가 먼저 조선 땅에 대학을 만들어 주겠다는 가만명분(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명분)의 작전이었습니다. 일제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김을 빼고 한국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1924년 서울에 경성제국대학을 전격적으로 설립했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고 친일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관제 대학이었습니다. 일제는 대학이 생겼으니 이제 한국인들이 따로 대학을 만들 필요가 없다며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정당성을 교묘하게 훼손했고 주동자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선제적인 조치와 집요한 방해로 인해 순수한 민간 주도의 대학 설립 꿈은 제도적 장벽에 가로막히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의 비판과 독립운동 노선의 사상적 갈등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직면한 또 다른 어려움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이념적 대립에서도 발생했습니다. 1920년대는 한반도 내에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하게 유입되고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청년층과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사회주의 진영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진영의 실력 양성 운동 노선을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 체제 안에서 국산품을 애용하거나 대학을 세우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근본적인 민족 해방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운동이 결국 돈 있는 자본가나 지식인 등 소수 유산 계급의 이익과 지위를 대변할 뿐이며 당장 굶주리고 있는 다수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는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기만적인 운동이라고 깎아내렸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은 교육보다 당면한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일제를 타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치열한 사상적 갈등은 지식인과 청년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전 국민적 지지를 받던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동력을 내부에서부터 갉아먹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배움을 향한 뜨거웠던 열망과 자립 정신의 현대적 가치

비록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제의 교묘한 방해와 경제적 한계, 그리고 내부의 분열로 인해 실제 우리 손으로 된 대학 문을 열지 못하고 미완의 과제로 남았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의의와 가치는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습니다. 이 운동은 나라를 잃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교육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자립 정신을 전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문화적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평범한 민초들이 1원이라는 소중한 돈을 모아 민족의 미래를 함께 고민했던 경험은 우리 역사에 깊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 표출된 한국인들의 엄청난 교육 열망은 일제가 함부로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어벽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놀라운 교육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교육의 기회와 대학이라는 공간은 100년 전 선조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그토록 갈구했던 간절한 꿈의 결과물입니다. 청춘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고등학생 여러분이 이 아픈 역사를 올바르게 마주하고 배움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진정한 역사 공부의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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