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 전말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하극상의 기록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밤, 1979년 12월 12일 서울의 밤하늘은 차가운 정적 대신 기습적인 총성과 무전기의 긴박한 음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10 26 사태로 절대 권력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겨우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길었던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민주주의가 찾아올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을 품고 있던 그때, 정통성을 갖추지 못한 한 무리의 군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사사로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의 가장 엄격한 규율인 지휘 계통을 무너뜨리고 상관을 향해 총구를 겨눈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이자 민주주의의 봄을 짓밟은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과연 그날 밤 서울 한복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국가의 군대가 순식간에 사조직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는지 그 긴박했던 순간의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권력의 빈자리와 신군부 세력의 등장

10 26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정을 수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국가지도자의 부재는 국가 안보와 정치 권력 전반에 커다란 공백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때 사건의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며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이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세력은 사건 수사 권한을 독점하면서 점차 국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역사적으로는 기존의 군부 세력과 구분하여 신군부라고 부릅니다.

신군부는 군 본연의 임무인 국가 방위에서 벗어나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10 26 사태 수사 과정에서 수집한 막대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정치권의 동향을 감시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반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장군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신군부의 비정상적인 권력 확장을 경계했습니다. 정승화 총치는 군 본연의 자리를 지키려 했고,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신군부 세력은 이에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두 세력 간의 물밑 대립은 날이 갈수록 첨예해졌고, 결국 폭발 직전의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하극상의 명분과 궁정동 수사라는 핑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정승화 총총이 10 26 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 안가 근처에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범행을 알고도 묵인했거나 이에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를 강제 연행하여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억지에 불과했으며, 실제 목적은 군부 내의 상급자이자 걸림돌인 정승화 총장을 축출하고 군권을 가로채기 위함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은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 하나회 핵심 인물들과 함께 구체적인 작전 수립을 끝마쳤습니다. 이들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식 승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정승화 총장을 강제로 연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군 통수권자의 정당한 재가(상급자가 하급자의 안건을 승인하여 결정함) 없이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것은 명백한 법률 위반이자 군사 반란에 해당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권력을 잡기 위해 군대의 가장 원칙적인 질서인 상명하복의 규율을 깨뜨리고 하극상(하급자가 상급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위력을 행사함)의 비극을 강행했습니다.

12월 12일 밤 육군참모총장 강제 연행 사태

12월 12일 오후 7시경, 수사관들과 무장한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원들이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전격 침투했습니다.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이 이끄는 수사관들은 정승화 총장에게 접근하여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관련해 조사할 것이 있으니 함께 가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를 강력히 거부하자, 수사관들은 미리 준비한 총기를 꺼내들고 총장을 강제로 차량에 실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관을 지키던 경비병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총성에 한남동 일대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이 총격전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계엄사령관이 직속 하급자들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다시피 연행된 이 사건은 신군부가 저지른 군사 반란의 결정적인 출발점이었습니다. 같은 시각, 전두환은 총리 공관으로 찾아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정승화 총장의 연행 승인을 강력히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규하 대행은 국방부 장관의 동의와 정식 절차가 필요하다며 승인을 거부하고 버텼습니다.

서울 진입과 주요 군사 거점의 기습 점령

신군부는 정승화 총장 연행과 동시에 사전에 모의한 대로 철저하게 군사 거점들을 점령해 나갔습니다. 경복궁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비밀 본부를 차린 신군부 지도부는 군사 사조직인 하나회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들은 정식 지휘 계통을 무시한 채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 등 특수부대 유닛과 제9보병사단 전방 부대들을 서울로 진격시켰습니다.

특히 유학성, 황영시, 노태우 등 신군부에 동조하는 고위 장성들은 자신들의 직위를 이용하여 최전방을 지켜야 할 부대들까지 서울로 불러들이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 구멍이 뚫릴 수 있는 비상 상황이었음에도, 신군부는 오직 자신들의 권력 장악을 위해 수도권 진입을 강행했습니다. 이들은 육군본부와 국방부 건물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언론사와 방송국, 중앙전화국 등 국가의 핵심 기반 시설들을 차례로 통제하에 두었습니다. 무력으로 국가의 주요 기관들을 마비시킨 신군부는 서울 중심부를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장태완 장군의 외로운 저항과 진압군의 무력화

신군부의 반란 행위에 맞서 군대의 정통성과 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 진정한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소장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특히 장태완 사령관은 신군부의 행위를 명백한 군사 반란으로 규정하고, 수도경비사령부의 전력을 끌어모아 반란군을 제압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그는 반란군 본부가 있던 경복궁 30경비단을 향해 전차와 병력을 집결시키며 진압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진압군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신군부는 이미 국방부 통신망을 차단하고 군 내부의 정보망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진압군은 정확한 상황조차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하나회 출신 지휘관들이 진압군 내부의 전력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무력화시켰습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 역시 자신의 직속 하급자였던 최세창 3공수여단장에 의해 배신당하고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습니다. 장태완 사령관은 끝까지 사령부 잔여 병력과 전차를 이끌고 경복궁으로 돌격하려 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고 신군부의 공작으로 병력 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외로운 저항을 마감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 재가 강요와 신군부 권력 장악의 완성

12월 13일 새벽 5시가 넘어선 시각, 서울 전역을 완전히 통제하에 둔 전두환과 신군부 지도부는 다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찾아갔습니다. 이들은 무력 시위를 배경으로 삼아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승인 서류에 서명할 것을 거듭 강요했습니다. 이미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점령당하고 국방부 장관마저 신군부의 설득과 압박에 넘어가 승인을 건의하는 상황에서, 최규하 대행은 결국 신군부가 작성해 온 연행 문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규하 대행은 서명 시각을 12월 13일 새벽 5시 10분으로 명확히 기록함으로써, 이 연행이 사전 승인이 아닌 사후에 무력으로 강요된 것임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실권을 손에 쥔 신군부에게 그것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단 하룻밤 만에 군대의 지휘권은 완전히 신군부 세력에게 넘어갔고, 정승화 총장을 비롯하여 군대의 법 질서를 지키려 했던 충직한 장성들은 모두 강제 예편(군인이 군 복무를 마치고 퇴역하는 것)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불운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군부 권력 장악이 남긴 역사적 상흔과 평가

12 12 군사 반란은 단순히 군 내부의 주도권 싸움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방향을 완전히 비틀어 버린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군권을 불법적으로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국가권력을 완전히 찬탈(정당한 권리가 없는 사람이 권력이나 자리를 강제로 빼앗음)했습니다.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5 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한 신군부는 결국 제5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독재 정권을 출범시키고 말았습니다.

10 26 사태 이후 국민들이 간절히 바랐던 서울의 봄과 민주화의 열망은 신군부의 군화짓밟혀 수년간 다시 어둠 속으로 묻혀야 했습니다. 사사로운 권력욕을 위해 국가의 군대를 사유화하고 상관을 향해 총구를 겨눈 12 12 군사 반란은 훗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비로소 역사적 법적 단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관련자들은 내란죄와 군사반란죄로 법정에 서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를 통해 법치주의와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하극상과 권력 찬탈로 점철된 12 12 군사 반란의 전말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희생과 시련을 거쳐 지켜져 왔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아픈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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