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가 남긴 권력의 빈자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권력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습니다. 유일한 후계자였던 아들 히데요리는 겨우 다섯 살에 불과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 유력한 다이묘 다섯 명을 고다이로로 임명하고 자신의 최측근이던 행정관 다섯 명을 오봉행으로 세워 어린 아들을 보좌하도록 안배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안전장치는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고다이로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려 온 노련한 다이묘였습니다. 반면 오봉행의 중심에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히데요시의 충실한 심복이자 뛰어난 행정가였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고 강직한 성격 탓에 다른 무장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점점 노골적으로 권력을 확장하자 미쓰나리는 이를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도요토미 가문의 충신을 자처한 그는 이에야스를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으로 규정했고 이에야스 역시 미쓰나리야말로 가문에 해를 끼치는 간신이라 맞받아쳤습니다. 명분 싸움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갈등은 결국 각자의 지지 세력을 모아 전면전으로 치닫게 됩니다.
동군과 서군 팽팽했던 세력 균형
1600년 가을 양측은 미노 지방의 작은 마을 세키가하라에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뭉친 세력은 동군이라 불렸고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은 서군이라 불렸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양측 지휘부의 성격이었습니다. 동군은 모든 명령권이 이에야스 한 사람에게 집중된 단일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반면 서군은 명목상의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와 현장 지휘를 맡은 그의 친척 모리 히데모토 그리고 실질적인 지휘자 미쓰나리로 지휘 체계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병력 규모는 양측이 비슷했지만 세부적인 조건에서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군은 병력 수에서 다소 우세했고 지형적으로도 세키가하라 주변 산악 지대를 먼저 장악해 동군을 반포위하는 형태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여기에 서군에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는 유력 무장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군이 훨씬 유리한 구도였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시작 전부터 이미 다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뛰어난 정보전과 사전 교섭의 달인이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서군 내부의 여러 장수들과 은밀히 내통하며 배신을 준비시켜 두었기 때문입니다.
전세를 뒤바꾼 결정적 배신
1600년 10월 21일 아침 전투는 시작되었습니다. 동군의 선봉이 서군 진영을 향해 첫 총격을 가하며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초반 전황은 예상과 달리 서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서군의 우세가 뚜렷해졌고 본진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이에야스조차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일 정도였습니다.
이때 전투의 향방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서군 소속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 편에 선 것입니다. 그는 원래 히데요시의 양자로 도요토미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이에야스 측과 은밀히 접촉하며 전후 보상을 약속받은 상태였습니다. 전투 중 이에야스가 그의 결단을 재촉하기 위해 위협 사격을 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제로 그 사격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의 배신이 전투의 흐름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히데아키가 점거하고 있던 마쓰오산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그가 배신하며 산에서 내려와 서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서군 진영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히데아키의 배신을 지켜본 다른 장수들도 연쇄적으로 전장을 이탈하거나 동군으로 돌아섰습니다. 심지어 일부 서군 장수는 아군인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가 퇴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은 편을 향해 총을 쏘고 달아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서군은 순식간에 붕괴했고 불과 하루 만에 승패가 갈리고 말았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동군은 병력의 극히 일부만 잃은 반면 서군은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하루의 승부가 만든 260년의 질서
패배한 미쓰나리는 도주했지만 결국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반면 승리한 이에야스는 이 전투를 발판으로 사실상 일본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는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의 신하라는 입장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완전히 그의 손에 넘어간 뒤였습니다. 1603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쇼군 직위를 받아 에도 막부를 열었고 이로써 일본은 이후 2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도쿠가와 가문이 통치하는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단순히 규모가 컸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병력과 지형에서 앞섰던 세력이 단 한 사람의 배신으로 하루 만에 무너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배신이 철저한 사전 계산의 결과였다는 점이 이 전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명분과 충성심을 앞세운 쪽이 패배하고 실리와 정보력을 앞세운 쪽이 승리했다는 이 결과는 이후 일본 역사가 나아갈 방향을 사실상 결정지어 버렸습니다. 도요토미 가문이 세운 화려한 권력은 불과 몇 년 뒤 완전히 몰락했고 그 자리를 대신한 도쿠가와 막부의 질서는 근대 이전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오랜 안정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단 하루의 전투가 이토록 긴 시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본사 최대의 분수령으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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