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묘와 사무라이(Daimyo and Samurai) 차이 정리, 1만 석이 갈라놓은 주군과 가신의 신분 이야기

다이묘와 사무라이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일까요

에도 시대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칼을 찬 남자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성 안에서 가마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낡은 옷을 입고 집에서 우산을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사무라이라고 부르기 쉽지만 신분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훨씬 복잡합니다. 이 글에서는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차이를 기록으로 확인되는 범위에서 차근차근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말의 뜻부터 보겠습니다. 사무라이라는 말은 모신다는 뜻의 옛 일본어 사부라우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헤이안 시대에 귀족을 경호하던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반대로 다이묘는 이 사무라이들이 모시는 주군에 해당합니다. 한 해설은 쇼군도 엄밀히 따지면 사무라이가 아니라 모심을 받는 쪽의 정점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리하면 다이묘는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이고 사무라이는 그 영주를 섬기며 일하는 무사 신분입니다. 그런데 에도 시대에 이르러 이 두 신분을 가르는 아주 구체적인 숫자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바로 쌀의 양입니다.

1만 석이라는 숫자는 왜 다이묘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요

에도 시대에 영지의 크기는 땅의 넓이가 아니라 쌀이 얼마나 나오느냐로 계산했습니다. 이를 고쿠다카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석고라고 부릅니다. 한 해설에 따르면 1석은 약 180리터로 어른 한 명이 1년 동안 먹는 쌀의 양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기준을 그대로 계산하면 1만 석은 어른 1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쌀이 나오는 규모입니다.

기준은 명확했습니다. 쇼군에게서 직접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받은 사람이 다이묘였고 1만 석에 못 미치는 영지를 받은 쇼군 직속 신하는 하타모토라고 불렀습니다. 세력이 큰 다이묘의 가신이 영주에게 1만 석 이상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쇼군이 준 것이 아니라 다이묘가 나눠 준 것이므로 다이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땅을 주었느냐가 핵심이었던 셈입니다.

다이묘가 다스리는 영역과 통치 조직을 번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번이라는 말이 에도 막부 시절에는 대부분 통칭에 머물렀다는 점입니다. 번이 공식 용어가 된 것은 1869년 판적봉환부터 1871년 폐번치현까지 단 2년 동안뿐이라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쓰마번이나 조슈번이라는 말도 당대에는 공식 명칭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신판과 후다이와 도자마는 어떻게 나뉘었고 왜 중요했을까요

다이묘 안에서도 급이 갈렸습니다. 기준은 도쿠가와 가문과 얼마나 가까웠느냐였습니다. 도쿠가와 일족에 속하는 다이묘는 신판이라고 했고 그중에서도 쇼군의 후계자를 낼 수 있는 특별한 가문을 고산케라고 불렀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를 섬긴 다이묘는 후다이라고 했는데 대대로 충성했다는 뜻입니다. 전투 전후로 도쿠가와의 세력에 들어온 다이묘는 도자마라고 했습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었습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는 도쿠가와 가문 말고도 약 200개의 가문이 있었는데 전투 이후 2년 사이에 88개 가문이 영지를 빼앗겨 대가 끊겼습니다. 신판은 군사적 요충지를 영지로 맡았다고 하고 후다이는 도쿠가와가 보기에 더 믿을 수 있는 측근이었습니다. 도자마는 그만큼 거리가 있는 존재로 다뤄졌습니다.

앞선 글에서 다룬 참근교대가 바로 그 고민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근교대의 목적이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도자마 다이묘를 통제하는 데 있었다고 설명하는 자료가 있습니다. 반대로 쇼군 곁에서 일하는 하타모토나 에도 가까이 있던 일부 후다이 다이묘는 처음부터 에도에서 살았습니다. 같은 다이묘라도 가문의 뿌리에 따라 처지가 이렇게 달랐습니다.

사무라이 안에도 계급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이제 사무라이의 세계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에도 시대의 무사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말을 탈 수 있는 상급 무사인 기시 곧 조시가 있었고 걸어 다니며 싸우는 가치가 있었으며 그 아래에 아시가루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기시와 가치만 정식 무사 신분인 사분에 속했습니다. 아시가루는 농민에서 징집된 보병으로 엄밀히 말하면 사무라이가 아니었다는 설명입니다.

막부 직속으로 보면 기시에 해당하는 사람이 하타모토이고 가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고케닌입니다. 둘을 가르는 것은 영지의 크기보다 쇼군을 직접 만날 수 있느냐 하는 자격이었습니다. 이를 오메미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한 자료는 영지가 고케닌보다 적어 200석도 안 되는 하타모토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하타모토는 무사로서의 명예는 있었지만 실제 정치적 위상은 낮았다고 합니다. 명예와 실속이 늘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숫자로 보면 규모가 실감납니다. 1704년 기준으로 하타모토는 약 5300명이었고 고케닌은 약 1만 7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타모토 8만기라는 표현이 쓰이는데 이는 하타모토와 그 아래 딸린 인원을 합친 병력이 6만 7천 명 남짓이었던 데서 나온 말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쇼군 한 명 밑에 이렇게 많은 직속 무사가 있었다는 점이 막부의 힘을 짐작하게 합니다.

칼을 찬 지배 계층은 실제로 어떻게 먹고살았을까요

사무라이는 지배 계층이었지만 살림살이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한 해설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영지를 직접 받아 세금을 거두는 대신 1년에 세 차례 영주의 창고에서 쌀을 받아 팔거나 집에 두고 먹으며 생활했습니다. 영지를 위임받아 직접 세금을 걷는 사람은 소수였고 하급 무사 일부는 쌀 대신 돈으로 받았습니다.

문제는 쌀값이었습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이 사회의 실세가 되었고 사무라이가 녹봉을 받는 시기에 쌀값이 떨어지도록 상인들이 움직였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쌀로 받는 사무라이는 손해를 보고 그 틈에 상인에게 빚을 지는 일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석은 에도 후기에 많은 하급 무사가 사회적 취약 계층으로 밀려난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업이 성행했습니다. 우산 만들기와 대나무 바구니 짜기와 벌레를 기르는 초롱 만들기가 대표적이었고 학식이 있으면 평민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에도에 사는 고케닌은 봉록만으로는 살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부업에도 체면의 순서가 있어서 글방이나 도장의 선생이 가장 나았고 밭을 가꾸는 일이 그다음이었으며 장사는 최하급으로 여겨 같은 사무라이에게 멸시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부유한 농민이 돈을 내고 고케닌의 양자가 되어 무사 신분을 얻는 관행도 있었는데 막부가 여러 차례 막았지만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낭인이 되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사라진 시대에 사무라이는 전사에서 관료로 어떻게 변했을까요

에도 시대는 전쟁이 거의 사라진 평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러자 사무라이는 싸움꾼보다 관료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 해설은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가 대부분 관료와 학자로 활약했다고 설명합니다. 막부가 무사들이 학문에 열중하고 관료가 되도록 이끄는 편이 다루기 쉽다고 보았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해석이므로 참고로만 알아 두시면 좋겠습니다.

칼도 달라졌습니다. 아무 데서나 칼싸움을 벌이면 당사자가 모두 큰 벌을 받았기 때문에 칼날을 대나무로 바꾸어 차고 다니는 경우도 잦았다고 합니다. 이를 다케미쓰라고 부릅니다. 칼은 싸움 도구라기보다 신분을 보여 주는 표시가 되었습니다. 무사가 하층민에게 참기 어려운 굴욕을 당하면 상대를 베어도 처벌받지 않는 부레이우치라는 권리도 있었지만 자주 행해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무사도의 모습도 이 시기와 이어집니다. 충성과 의리를 중시하는 무사도는 중앙집권적인 에도 막부가 자리 잡은 뒤에 강조되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오늘날 알려진 무사도의 이미지는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이 유학 사상과 섞어 만든 내용에 메이지 시대 니토베 이나조가 쓴 무사도라는 책이 더해지며 굳어졌다고 합니다. 센고쿠 시대에는 배신과 이직이 흔했다고 하니 우리가 떠올리는 충성스러운 사무라이는 상당 부분 평화 시대가 만든 이미지인 셈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시대를 어떻게 끝냈을까요

이 신분 질서는 메이지 유신과 함께 단계적으로 무너졌습니다. 1869년에 다이묘 274명이 영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판적봉환을 했습니다. 다만 다이묘는 지번사라는 자리에 임명되어 한동안 통치를 이어 갔습니다. 같은 해에 공가와 다이묘라는 칭호가 사라지고 화족이라는 새 귀족 신분이 만들어졌으며 옛 무사 계급은 사족이라 부르기로 정해졌습니다.

결정타는 1871년 8월 29일의 폐번치현이었습니다. 번이 없어지고 현이 설치되었으며 지번사도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다이묘들은 번 수입의 10퍼센트를 받기로 약속받았고 도쿄에서 살도록 정해졌습니다. 그해에 사족에게도 칼을 차지 않을 자유를 준 산발탈도령이 나왔고 1876년에는 다이묘와 공경과 무사의 녹봉을 정리하는 대신 일시금으로 공채를 나눠 주는 질록처분과 폐도령이 이어졌습니다. 폐도령은 대례복을 입은 사람과 군인과 경찰관이 아니면 칼을 차고 다니지 못하게 한 조치였습니다. 칼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칼은 특권 신분의 표시였기 때문에 이 조치는 신분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일부 사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신식 군대에 진압되면서 사무라이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설명됩니다. 그래도 사족이라는 구분은 호적에 오래 남았습니다. 사족 제도는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폐지되었고 호적상의 구분이 사라진 것은 이듬해 1948년 1월 1일부터였다고 합니다.

다이묘는 영지를 잃고 화족이라는 새 귀족이 되었고 사무라이는 칼과 특권을 잃은 채 사족이라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1만 석이라는 숫자가 갈랐던 두 신분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같은 파도 앞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이묘와 사무라이 중 어느 쪽의 삶이 더 힘겨웠다고 보시나요.

#다이묘 #사무라이 #에도시대 #일본역사 #신분제도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