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킨코타이는 왜 다이묘를 파산시킨 제도로 기억되고 있을까요
에도 시대 일본의 큰길을 수천 명의 행렬이 줄지어 지나가는 장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앞에는 총과 활을 든 무사들이 서고 가운데에는 가마를 탄 영주가 있으며 뒤로는 짐을 진 일꾼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 거대한 이동이 바로 산킨코타이입니다. 한국에서는 참근교대라고 부르는 이 제도는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 오가며 살도록 한 에도 막부의 규칙이었습니다. 다이묘는 영지를 다스리던 영주를 뜻합니다.
이 제도에는 오래된 이미지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막부가 다이묘의 돈을 바닥내서 반란을 꿈도 못 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도 참근교대가 다이묘에게 막대한 경제적 지출을 요구한 제도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산킨코타이라고 하면 다이묘를 파산시킨 제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통설을 다시 따져보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 매체는 막부가 왕복과 에도 체류를 강요해 번이 큰 지출을 떠안았고 그 결과 막부에 저항할 체력이 깎였다는 설명이 오래된 정설이었지만 최신 연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는 산킨코타이 참근교대 제도가 정말 다이묘를 파산시키려는 계획이었는지 기록에 남은 숫자와 사례를 따라가며 살펴보겠습니다.
1635년 이에미쓰가 못 박은 참근교대에는 어떤 규칙이 있었을까요
참근교대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이묘들이 스스로 에도로 가서 막부에 인사를 올리는 자발적인 행동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 관행이 점점 자리를 잡아 1617년 무렵에는 동쪽과 서쪽의 다이묘가 모두 에도에 다녀오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부가 안정기에 접어든 1635년에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무가제법도를 고쳐 이를 정식 의무로 만들었습니다. 이때 개정된 법령을 당시 연호를 따서 간에이령이라고 부릅니다.
규칙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다이묘는 1년은 에도에서 1년은 영지에서 지내며 두 곳을 번갈아 오갔습니다. 에도로 들어가는 시기는 매년 여름 4월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이묘의 정실 부인과 후계자는 에도에 계속 머물러야 했습니다. 가족이 사실상 인질이 되는 구조였습니다. 여기에 가신과 병력이 함께 따라다녔으니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큰 행렬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간에이령의 조문입니다. 이 조문에는 최근 수행하는 인원이 너무 많아 영지의 비용이 크고 백성의 수고도 크니 적당한 수로 줄이라는 취지의 문장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만약 막부가 처음부터 다이묘의 돈줄을 말리려 했다면 행렬을 줄이라는 문장을 법에 적어 넣었을지 의문이 남습니다. 또 법령은 교대라는 말 대신 교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예외도 있었습니다. 쇼군 곁에서 일하는 하타모토와 쇼군과 가까운 일부 신판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는 처음부터 에도에서 살았습니다.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이 중요했던 쓰시마섬의 소씨 가문은 3년에 한 번 교대하도록 했습니다. 쇼군 가문의 친척인 고산케 가운데 에도와 가장 가까웠던 미토번은 다이묘가 에도에 머물며 쇼군을 보좌해야 해서 아예 교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번은 다이묘가 다스리던 영지와 그 통치 조직을 가리킵니다.
행렬 한 번에 수억 엔이 들었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기록으로 남은 숫자를 하나 보겠습니다. 가가번은 지금의 이시카와현 일대를 다스린 큰 번으로 마에다 가문이 영주였습니다. 일본의 매체 니폰닷컴이 소개한 기록에 따르면 10대 번주 마에다 하루나가가 1808년에 에도에서 가나자와로 돌아올 때 쓴 비용은 은으로 332관 466몬메 남짓이었고 이는 약 5500료에 해당합니다. 이 가운데 수행한 번사들에게 준 수당만 741료 남짓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숙박비와 강을 건너는 요금과 다른 번의 땅을 지날 때 건네는 선물과 보상금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이 기사는 1료를 대략 10만 엔으로 잡아 총비용을 약 5억 5천만 엔으로 계산했습니다.
행렬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가번의 대명행렬도 병풍에는 사람 473명과 말 14마리와 가마 4대가 그려져 있는데 시기에 따라 총 2000명이 행렬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는 약 4000명이 움직인 시기도 있었고 비용이 지금 가치로 5억에서 7억 엔에 이른다고 소개합니다. 에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쓰마번은 도중 경비만 약 17억 엔에 이른다는 추산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산치는 기준에 따라 크게 달라지므로 대략의 크기를 짐작하는 참고 수치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오카야마현 북동부에 있던 쓰야마번의 1818년 행렬도는 이 부담을 눈으로 보여 줍니다. 총과 활을 든 부대와 가마에 탄 번주가 그려진 이 그림은 일곱 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니폰닷컴이 소개한 장면은 그중 한 폭이고 전체 그림에는 이 장면의 일곱 배에 이르는 사람과 무기와 도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행렬이 에도와 영지 사이 60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서 오갔습니다. 멀리서 오는 번일수록 며칠에서 몇 주씩 길 위에서 돈을 써야 했으니 에도와 거리가 먼 번이 특히 무거운 짐을 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길 위의 비용 못지않게 에도 저택에서 쓰는 돈도 막대했을까요
부담은 길 위에서만 생기지 않았습니다. 각 번은 에도에 번저라는 저택을 두었고 그곳에는 정실 부인과 후계자와 가신들이 머물렀습니다. 니폰닷컴 연재는 에도에서 소비하는 번의 비용이 막대한 액수에 이르렀고 이것이 에도와 영지 사이의 갈등을 낳았다고 정리합니다. 도중 경비와 함께 에도 체재비까지 더해지면 번의 살림이 빠듯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갈등을 보여 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막부 말기 아이즈번의 가로였던 사이고 다노모는 에도에서 쓰는 돈이 지나치다고 걱정해 번주에게 간언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샀다고 합니다. 당시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미노의 다카스번 집안 출신으로 아이즈번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멀리 아이즈로 떠난 것 같지만 사실은 에도 요쓰야에 있던 다카스번저에서 와다쿠라몬 안쪽의 아이즈번저로 이사한 것에 가까웠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같은 매체는 참근교대의 가장 큰 폐해로 영지를 돌아보지 않는 젊은 번주가 길러진 점을 꼽았습니다. 후계자가 어릴 때부터 에도에서 자라면 영지의 사정이나 백성의 삶에 애착을 갖기 어렵다는 해석입니다. 돈의 문제가 사람의 문제로 번진 셈입니다.
막부는 정말 다이묘의 돈을 말리려고 이 제도를 만들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최근의 답은 조금 다릅니다. 일본의 한 교육 자료는 이동과 에도 체류에 큰돈이 들어 결과적으로 번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군사력이 약해졌을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지금의 시각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기사는 에도에 와서 쇼군을 뵙는 일이 다이묘의 본분이었고 전쟁이 없는 시대에 복종의 뜻을 드러내는 의사 표시였다고 풀이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도 이 제도를 쇼군에 대한 복속과 병역 부담을 제도화한 것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견제의 성격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두어 인질로 삼고 다이묘를 1년마다 오가게 해 통제한 조치였다는 것이 우리역사넷의 설명입니다. 특히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도자마 다이묘를 다루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해설도 있습니다. 다만 견제와 재정 파탄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렬이 커진 데는 다이묘들의 체면 경쟁도 한몫했습니다. 행렬이 번의 위세를 자랑하는 무대가 되자 힘이 약한 다이묘도 무리해서 화려하게 꾸며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재정이 어려워지면 겉모습을 갖추려고 임시 인원을 고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막부가 번의 경제적 파탄을 우려해 행렬 규모를 제한한 사례까지 나왔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국 역사와 비교하면 참근교대의 무게가 더 잘 보입니다. 신라의 상수리 제도와 고려의 기인 제도도 지방 세력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본인과 가족과 가신과 병력까지 이끌고 체류 비용을 영지에서 대야 하는 참근교대보다 훨씬 가벼웠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정리하면 재정 압박은 분명한 효과였지만 다이묘의 파산이 이 제도의 유일한 설계 목적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참근교대가 남긴 길과 도시와 문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참근교대가 남긴 것은 부담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역사넷은 이 제도가 다이묘에게 막대한 지출을 요구했지만 에도라는 신도시의 성장과 일본 각지의 교통 발달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수천 명이 해마다 오가니 도로와 역참이 발달하고 에도의 인구가 늘었으며 이들을 상대로 한 상업도 함께 커졌다는 설명입니다. 지방의 물건과 소식이 에도로 모이고 에도의 유행이 다시 각 지방으로 퍼지는 문화의 순환도 생겼습니다.
다이묘가 묵는 숙소인 본진의 시작도 이 시대와 맞닿아 있습니다. 한 자료에 따르면 1634년 이에미쓰가 교토로 올라갈 때 숙박할 저택의 주인을 본진 역할에 임명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길 위의 행렬이 곳곳의 숙소와 상점을 먹여 살리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행렬을 마주친 백성들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자기 영지를 지나는 자기 번 다이묘의 행렬이 오면 땅바닥에 엎드려 인사해야 했고 다른 번 다이묘의 행렬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놓고 무례를 저지르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1862년 사쓰마번 행렬에서 벌어진 나마무기 사건이 사쓰에이 전쟁의 원인이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만 출산을 돕는 조산사와 소식을 전하는 파발꾼은 급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행렬에 멈추지 않고 거슬러 갈 수 있었습니다.
행렬이 가벼워지고 제도가 막을 내린 뒤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행렬은 점점 가벼워졌습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재정 부담을 덜려고 행렬이 간소화되었고 1862년 분큐 개혁 때는 3년에 한 번 참근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금문의 변을 계기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막부의 위신이 예전 같지 않아 사쓰마번을 비롯해 따르지 않는 번이 많아졌고 어느새 흐지부지되었습니다. 결국 대정봉환과 함께 참근교대는 폐지되었습니다.
이 결말은 참근교대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제도는 막부의 권위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굴러가는 제도였습니다. 권위가 흔들리자 규칙도 함께 힘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묘를 파산시킨 제도라는 한 줄 요약은 어디까지 맞을까요. 큰 비용이 번의 살림을 짓눌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치 의례와 통제와 군역이 겹친 통치 시스템이었고 그 덕분에 도로와 도시와 문화가 함께 자랐다는 점까지 보아야 이 제도의 전체 모습이 보입니다. 중앙이 지방에 무엇을 요구하고 지방은 어떻게 버티는가 하는 질문은 지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산킨코타이를 통제 제도와 통치 시스템 중 어느 쪽으로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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