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타이국의 위치를 둘러싼 규슈설과 기나이설의 근거를 정리했습니다. 여왕 히미코의 정체와 위지 왜인전의 기록 그리고 고고학이 밝혀낸 최신 단서까지 쉽게 풀어냈습니다.
한 나라가 자기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나라의 위치를 모른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일본이 지금 딱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3세기 무렵 일본 열도에는 30여 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린 강력한 세력이 있었고 그 나라를 다스린 사람은 히미코라는 여왕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추측이 아니라 중국 역사서에 또렷하게 적혀 있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에도 시대부터 지금까지 300년 넘게 학자들이 싸우고 있고 관련 논문과 책은 수천 편이 넘습니다. 야마타이국이라는 이름의 이 나라는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유명하면서 동시에 가장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입니다. 오늘은 야마타이국을 둘러싼 이 오래된 미스터리를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중국 역사서가 남긴 단 하나의 단서
야마타이국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는 중국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 가운데 왜인에 관한 부분에서 나옵니다. 흔히 위지 왜인전이라고 부르는 이 짧은 기록이 사실상 유일한 원전입니다. 여기에는 놀랄 만큼 구체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2세기 말 왜 지역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여러 나라가 서로 싸웠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여러 나라가 함께 히미코를 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히미코는 귀도라 불리는 주술로 사람들을 이끌었으며 결혼하지 않은 채 궁전에 머물렀고 동생이 실무를 도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야마타이국의 규모도 나옵니다. 7만여 호에 이르는 큰 나라였고 궁전과 방어용 울타리를 갖추었으며 30여 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렸다고 합니다. 238년에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위나라 황제는 히미코에게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으로 만든 도장 그리고 구리거울 100장을 내렸습니다. 남쪽의 구나국이라는 세력과 대립하다가 히미코는 248년 무렵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세워진 남자 왕 아래에서 나라가 다시 혼란에 빠지자 히미코의 친족인 어린 여성이 왕이 되어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상세한 기록 어디에도 야마타이국의 정확한 위치가 오늘날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적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면 바다 한가운데가 나옵니다
위지 왜인전에는 분명히 길 안내가 들어 있습니다. 한반도의 대방군에서 출발해 바닷길을 따라가다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규슈 북부에 상륙하고 거기서부터 여러 나라를 지나 마침내 야마타이국에 이른다는 식입니다. 방위와 거리와 걸리는 날짜까지 친절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기록에 적힌 방위와 거리를 곧이곧대로 지도 위에 옮기면 야마타이국은 규슈 남쪽 태평양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됩니다. 육지가 아니라 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기록 어딘가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야마타이국 논쟁의 두 갈래가 갈라집니다. 한쪽은 방위가 틀렸다고 봅니다. 남쪽이라고 적힌 부분을 실제로는 동쪽으로 읽어야 하며 그러면 목적지는 기나이 지역 즉 지금의 나라와 오사카 일대가 됩니다. 다른 쪽은 거리와 일수가 부풀려졌다고 봅니다. 고대 중국은 먼 나라를 실제보다 크고 멀게 적는 경향이 있었으니 거리를 줄여 읽으면 야마타이국은 규슈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같은 문장을 놓고 무엇을 오류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답이 완전히 달라지는 구조입니다.
규슈설이 내세우는 근거들
규슈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에도 시대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였습니다. 그는 히미코를 규슈 남부에 살던 구마소라는 집단의 여왕으로 보았습니다. 천황가와는 무관한 지방 세력이 멋대로 중국에 조공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이 설의 가장 큰 장점은 상식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대방군에서 배를 타고 오는 사신이 규슈 북부에 내린 뒤 다시 몇 달을 걸어 나라 분지까지 갔다고 보는 것보다 규슈 안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고고학 자료도 힘을 보탭니다.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유적은 도랑과 울타리로 둘러싸인 거대한 마을 터인데 망루와 창고 그리고 수천 기의 항아리 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위지 왜인전이 묘사한 궁전과 방어 시설을 갖춘 나라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발굴 당시 일본의 시작은 규슈에 있었다는 주장에 큰 힘이 실렸습니다. 후쿠오카의 히라바루 유적에서는 거대한 구리거울이 여러 장 나와 히미코의 무덤 후보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청동기와 철기가 들어온 통로가 규슈 북부였다는 점은 이 지역이 당시 열도에서 가장 앞선 곳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야마타이국이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다면 그 위치는 대륙과 가까울수록 설명하기 쉽습니다.
기나이설이 내세우는 근거들
기나이설의 뿌리는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일본서기 자체가 야마타이국을 야마토 왕권과 이어진 것으로 보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이 설의 핵심 논리는 이름에 있습니다. 중국 사서에 적힌 야마타이라는 발음이 결국 야마토를 옮긴 것이며 그렇다면 야마타이국은 곧 훗날 일본을 통일하는 야마토 정권의 초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라 이름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설명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발굴 성과가 이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마키무쿠 유적이 결정적이었습니다. 3세기 무렵 형성된 이 거대한 유적에서는 열도 각지에서 온 토기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여러 지역의 물건이 한곳에 모였다는 것은 이곳이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중심지였음을 뜻합니다. 같은 자리에 있는 하시하카 고분은 길이 280미터에 이르는 초기 전방후원분으로 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궁내청은 이 무덤을 어느 황족 여성의 묘로 지정해두었지만 조성 시기가 히미코의 사망 시점과 겹친다는 연구가 나오면서 히미코의 무덤이 아니냐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규슈에는 이 시기에 이만한 규모의 무덤이 없다는 점도 기나이설의 강한 무기입니다.
기나이 지역의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삼각연신수경이라는 구리거울도 오랫동안 근거로 쓰였습니다. 위나라 황제가 히미코에게 내린 거울 100장이 바로 이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다만 이 거울은 중국 본토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고 일본에서만 수백 장이 나와 열도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결정적 증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양쪽 모두 상대를 완전히 꺾을 한 방을 갖지 못한 채 각자의 자료를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300년 넘게 싸움이 끝나지 않는 진짜 이유
야마타이국 논쟁이 이토록 오래 이어지는 데는 자료 부족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문제가 순수한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마타이국이 기나이에 있었다면 히미코는 천황가의 조상 계보 어딘가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의 혈통이 끊긴 적 없이 이어졌다는 관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야마타이국이 규슈에 있었다면 히미코는 나중에 야마토 정권에 정복당한 지방 세력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천황가의 정통성이라는 민감한 주제와 곧바로 맞닿는 셈입니다.
여기에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히미코는 중국 기록에는 이렇게 자세히 등장하는데 정작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그 이름이 없습니다. 3세기 열도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이 자국 역사서에서 통째로 사라진 것입니다. 일부러 지웠다는 주장과 다른 이름으로 흔적만 남았다는 주장이 맞섭니다. 학계 지형도 흥미롭습니다. 도쿄대와 규슈대 계열 연구자들은 규슈설을 교토대와 오사카대 계열 연구자들은 기나이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해 오랫동안 명문대 사이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야마타이국은 사실 확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체성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논쟁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결론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결말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여기서 멈추셔도 좋습니다.
아직 열려 있는 답과 이 미스터리가 남긴 것
현재 흐름만 놓고 보면 기나이설이 다소 앞서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마키무쿠 유적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하시하카 고분의 연대 측정 결과가 3세기 중반에 가깝게 나오면서 기나이 중심지설에 무게가 실렸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연대 측정 자체가 학계에서 완전히 합의된 것은 아니며 방법과 표본을 두고 반론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규슈설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마키무쿠가 3세기의 큰 중심지였다는 사실과 그곳이 곧 야마타이국이라는 주장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여전히 없습니다. 위나라 황제가 히미코에게 내린 금 도장이 어느 유적에서 발견된다면 논쟁은 그날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야마타이국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도 열도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력한 고분 상당수가 천황가의 능묘로 지정되어 있어 발굴 자체가 제한된다는 현실적 벽도 있습니다. 답을 알 수 있는 땅을 파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야마타이국 논쟁은 과열된 면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자료가 한문 몇 천 자에 불과한데 그 위에 쌓아 올린 해석은 지나치게 방대합니다. 어떤 주장은 근거보다 결론이 먼저 정해져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논쟁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요시노가리와 마키무쿠 같은 유적이 발굴되었고 3세기 열도의 실제 모습이 훨씬 선명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야마타이국이 교류한 상대는 한반도를 거쳐 온 사람들이었고 이 시기 열도의 변화는 한반도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수수께끼의 진짜 매력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답이 없기에 사람들은 계속 땅을 파고 기록을 다시 읽습니다. 야마타이국은 지금도 어딘가 흙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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