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천하를 절반쯤 얻고 가신에게 배신당하다

약소 가문에서 시작된 파격적인 행보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지방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출발부터 그리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노부히데가 오다 가문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본가가 아닌 방계였던 탓에 집안 곳곳에 반대 세력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노부나가 역시 가독을 물려받을 당시 집안 안팎에서 인망이 두텁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상식에서 벗어난 옷차림과 기행으로 오와리의 바보라는 조롱 섞인 별명까지 얻었는데 이런 평판은 그가 정작 얼마나 치밀한 전략가였는지를 가려버리는 역설적인 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친족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오와리 지역을 통일했고 이 과정에서 방계 혈통이었던 그가 마침내 오다 가문의 명실상부한 당주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시작한 그의 여정은 이후 극적인 반전을 거듭하며 일본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를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오와리를 통일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는데 오다 가문의 명목상 지배자였던 인물이 살해당하는 사건에 휘말리자 노부나가는 주군을 살해한 죄를 물어 관련자를 처단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소수 병력으로 일으킨 기적 같은 승리

노부나가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결정적인 사건은 1560년 벌어진 오케하자마 전투입니다. 당시 동해 지역 세 개 지방을 다스리던 강대한 세력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삼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교토 상경을 명분 삼아 오와리를 침공했습니다. 이에 맞선 노부나가의 병력은 겨우 삼천 명에 불과했지만 그는 정면 대결 대신 기습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결국 그는 전국시대 3대 기습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전투에서 요시모토의 본진을 급습해 그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뒤집은 이 극적인 승리로 노부나가는 단숨에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후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이후 그는 1568년 교토로 진격해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새롭게 옹립하며 정치적 실권까지 손에 넣었고 나가시노 전투에서는 조총 부대를 효과적으로 배치해 당대 최강으로 꼽히던 기마대를 격파하는 등 전술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전장에서도 결코 뒤에 숨어 지휘만 하는 인물이 아니었는데 오케하자마 전투는 물론 이후 아사쿠라 가문을 무너뜨릴 때도 직접 선두에서 말을 몰아 병사들을 이끄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지며 이런 솔선수범이 그의 군대에 대한 신뢰를 한층 두텁게 만들었습니다.

칼보다 강했던 정치와 경제 감각

노부나가의 진짜 재능은 전장에서의 용맹함보다 오히려 정치와 경제를 다루는 감각에 있었습니다. 그는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시장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이 정책 자체는 사실 그가 처음 고안한 것이 아니라 오미 지방의 다이묘 롯카쿠 사다요리가 먼저 시행했던 방식을 그가 받아들여 자신의 영지에 폭넓게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독창적인 발명가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좋은 아이디어를 알아보고 과감하게 채택해 자신의 영지 전체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실용적인 안목의 소유자에 가까웠습니다. 다른 다이묘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항구 도시 사카이를 장악해 총포 유통망을 독점한 것 역시 그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외국과의 무역에도 파격적으로 문을 열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라는 상징적 권위를 정치적 지렛대로 적극 활용하는 등 그의 전략은 전장 밖에서 훨씬 다채롭게 펼쳐졌습니다. 한편 그는 무력을 앞세워 정치에 개입하려던 불교 세력에도 단호하게 맞섰는데 히에이잔 엔랴쿠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나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오랜 전쟁은 그가 전통적인 종교 권위조차 자신의 통치 아래 두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를 단순한 반종교적 태도로만 보기는 어려우며 무사의 권위를 종교에 버금가는 위치로 끌어올리려 한 정치적 계산이었다는 해석도 함께 존재합니다. 실제로 그가 가신을 문책할 때 남긴 기록에는 무사의 길과 종교의 길은 서로 다르다는 취지의 언급이 담겨 있어 그가 종교 자체를 완전히 부정했다기보다는 정치와 신앙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려 했다는 시각에 힘을 실어줍니다.

믿었던 부하가 겨눈 칼끝

1582년 노부나가는 일본의 중심부와 핵심 교통로 대부분을 장악하며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쪽 지역 정복을 위해 여러 장수를 각지로 파견한 뒤 자신은 교토의 혼노지에 머물며 다과회를 열고 잠시 여유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신뢰하던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가 만삼천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갑작스럽게 방향을 돌려 혼노지를 포위했습니다. 소수의 호위만 대동한 채 무방비 상태였던 노부나가는 화살로 저항했지만 결국 조총 부대의 총격에 어깨를 관통당했고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깨닫자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러 생을 마감했습니다. 절이 완전히 불타버린 탓에 그의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나머지 정작 노부나가 본인조차 자신을 습격한 것이 다른 세력이 아닌 자신의 오랜 가신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까지 믿기 어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미쓰히데가 어떤 이유로 오랜 세월 섬기던 주군을 배신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일본 역사상 최대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야심 때문이라는 설과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는 설이 엇갈리지만 그는 평소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어 승산 없는 도박에 나설 인물이 아니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당시 함께 있던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 역시 인근 거처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지원에 나섰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맞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자가 같은 날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겹치기도 했습니다.

배신자에게는 없었던 민심

혼노지의 변으로 권력을 손에 넣은 미쓰히데였지만 그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정의로운 혁명가에 빗대며 명분을 내세우려 했지만 정작 평소 노부나가의 통치를 반기던 교토 백성들은 이를 어린아이들조차 비웃을 정도로 냉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졌던 교토의 상공업자들이 오히려 노부나가의 엄격하고 질서 있는 통치를 반겼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무력만 앞세운 정복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 능력까지 갖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노부나가는 치안 유지에 매우 엄격해 자신의 병사가 백성을 희롱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직접 처벌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런 민심의 차이는 미쓰히데를 따르는 지방 호족 세력이 예상보다 적었다는 사실로도 확인됩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신망이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 승패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아무리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했더라도 백성들의 지지 없이는 그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결국 노부나가의 또 다른 유력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속하게 군대를 돌려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했고 배신자는 권력을 잡은 지 불과 열흘 남짓 만에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미쓰히데는 패주하던 중 지역 농민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고 전해지는데 한 시대를 뒤흔든 거사의 주인공치고는 너무나 초라하고 허망한 최후였다는 점에서 이 결말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절반의 통일이 남긴 완성되지 못한 꿈

노부나가의 죽음 이후 권력은 자연스럽게 히데요시에게로 넘어갔고 그는 노부나가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결국 1591년 일본 통일을 완성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통일의 영광은 노부나가가 아닌 그의 부하가 차지하게 된 셈입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노부나가의 후계자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손자를 후계 구도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는데 이는 히데요시 스스로도 자신의 권력이 노부나가가 쌓아온 기반과 정당성 위에 서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노부나가가 닦아놓은 군사와 경제 종교 전반에 걸친 개혁의 토대가 없었다면 이후의 통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비록 통일의 마지막 장을 직접 쓰지는 못했지만 그 이야기의 가장 결정적인 서두를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천하를 눈앞에 두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에 무너진 그의 최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룬 업적 못지않게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기며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에게 회자되는 상징적인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예상치 못한 배신이나 위기를 가리켜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표현을 관용구처럼 사용할 정도이니 400년도 더 지난 이 사건이 일본인들의 정서 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천하를 손에 쥐고도 끝내 완성하지 못한 그의 꿈은 역설적으로 완벽한 성공보다 더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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