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9월 24일 새벽 일본 규슈 가고시마의 시로야마 언덕에는 수백 명의 사무라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을 둘러싼 정부군은 3만 명이 넘었습니다. 포위된 쪽의 대장은 사이고 다카모리였고 포위한 정부를 만든 사람 역시 사이고 다카모리 자신이었습니다. 불과 10년 전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었던 영웅이 이제는 자신이 세운 나라의 군대에 쫓겨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은 메이지 유신이 어떤 혁명이었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메이지 유신은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일으켰지만 그 결과 사무라이라는 신분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혁명의 주인공이 혁명의 마지막 희생자가 된 셈입니다. 오늘은 메이지 유신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사무라이가 사무라이를 없애는 길을 택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흑선 네 척이 250년 된 막부를 흔들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은 1853년입니다. 미국 해군 제독 페리가 검은 증기선 네 척을 이끌고 에도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연기를 내뿜으며 바람 없이도 움직이는 이 거대한 배를 흑선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250년 가까이 나라를 다스리며 외국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페리는 대포를 앞세워 개항을 요구했고 막부는 이듬해 결국 조약을 맺었습니다. 1858년에는 서양 여러 나라와 불평등한 통상 조약까지 체결하게 됩니다. 문제는 막부가 천황의 허락 없이 조약을 맺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천황을 받들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막부는 외국 앞에서 무릎 꿇은 무능한 정권으로 비쳤습니다. 250년 동안 흔들림 없던 권위가 단 몇 년 만에 크게 금이 간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이렇게 외부의 충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급 사무라이들은 왜 막부를 무너뜨리려 했을까요
막부 타도에 앞장선 것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이었습니다. 두 번은 오래전 전쟁에서 도쿠가와 가문에 패해 늘 견제를 받아온 지역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로 움직인 사람들이 번주 같은 높은 사람이 아니라 하급 사무라이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는 신분에 따라 앞날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집안이 낮으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어려웠고 녹봉도 적어 생활이 빠듯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그리고 기도 다카요시 같은 인물들은 모두 이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들에게 막부 체제는 나라도 지키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가능성까지 막는 벽이었습니다.
처음에 사쓰마와 조슈는 서로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두 번 모두 서양 함대와 직접 싸워 보고 나서 칼과 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1866년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두 번은 삿초 동맹을 맺었습니다.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선언했고 이듬해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이 막부 세력을 꺾으면서 메이지 유신의 새 정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으로 영주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막부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곧바로 강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는 여전히 260개가 넘는 번이 있었고 각 번은 자기 땅과 군대와 세금을 따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은 이대로는 서양과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869년 정부는 판적봉환을 실시했습니다. 각 번의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땅과 백성을 천황에게 돌려주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1871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번을 아예 없애고 중앙에서 관리를 보내는 현을 설치했습니다. 수백 년 이어진 영주의 시대가 단 몇 년 만에 끝나버린 것입니다.
이 조치는 사무라이들에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사무라이의 녹봉은 원래 번에서 나왔는데 번이 사라지자 정부가 그 부담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전체 인구 중 사무라이 가족의 비율은 적지 않았고 이들에게 주는 녹봉은 나라 재정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사무라이 출신 지도자들이 이제 자기 동료들의 밥줄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징병령과 폐도령은 사무라이의 존재 이유를 지웠습니다
사무라이의 가장 큰 특권은 싸울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전쟁은 사무라이만의 일이었고 농민이나 상인은 무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873년 메이지 정부는 징병령을 발표했습니다. 신분에 상관없이 일정 나이가 된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양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국민 군대 앞에서 사무라이만의 전투 기술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기반도 무너졌습니다. 정부는 녹봉을 줄이다가 1876년 질록처분을 통해 녹봉 지급을 완전히 끝내고 일시금 성격의 공채로 바꿔 주었습니다. 장사나 농사 경험이 없던 많은 사무라이들이 이 돈을 금방 잃고 가난에 빠졌습니다.
같은 해 결정타가 날아왔습니다. 바로 폐도령입니다. 군인과 경찰 같은 사람을 빼고는 공공장소에서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사무라이에게 허리에 찬 두 자루의 칼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자존심이자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칼을 빼앗긴다는 것은 사무라이로서의 정체성을 빼앗긴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무렵 규슈와 혼슈 서쪽 곳곳에서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왜 자신이 만든 정부에 칼을 겨눴을까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유신 최고의 영웅이었습니다. 보신 전쟁 때는 막부 측의 가쓰 가이슈와 담판을 지어 에도성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넘겨받았습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던 도시가 전쟁의 불길을 피한 것은 그의 결단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 정부 안에서 그는 점점 외로워졌습니다. 1873년 조선에 사절을 보내는 문제를 두고 정부가 둘로 갈라졌는데 이를 정한론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해외 사절단으로 서양을 둘러보고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지금은 나라 안을 먼저 다져야 한다며 반대했습니다. 결국 사이고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 가고시마로 내려갔습니다.
가고시마에서 그는 사학교를 세워 젊은 사무라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곧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877년 사학교 학생들이 정부 무기고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사이고는 제자들을 버리지 못하고 반란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 역사상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 전쟁입니다.
전쟁은 여덟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흔히 칼과 총의 대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사이고 측도 총과 대포를 사용했습니다. 다만 보급과 병력에서 정부군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정부군의 상당수는 징병령으로 모인 평민 출신 병사들이었습니다. 결국 시로야마에서 부상을 입은 사이고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무라이가 일으킨 메이지 유신은 이렇게 사무라이의 마지막 반란을 평민 군대가 진압하는 장면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사이고의 오랜 친구이자 정적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마저 불만 사족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은 강화도에서 전혀 다른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폐도령이 내려진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한 해 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킨 것이 계기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힘을 키운 일본이 과거 페리가 자신들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조선의 문을 연 것입니다. 이 조약은 조선이 맺은 첫 근대 조약이었지만 치외법권 등을 담은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남긴 빛과 그림자를 함께 봐야 합니다
메이지 유신은 분명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일본은 봉건 국가에서 헌법과 의회 그리고 철도와 공장을 갖춘 근대 국가로 바뀌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인생이 정해지던 사회가 능력으로 경쟁하는 사회로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특히 혁명을 이끈 계층이 자기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점은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메이지 유신의 개혁은 백성의 목소리보다는 소수 지도자들이 위에서 밀어붙인 방식이었습니다. 사쓰마와 조슈 출신 인물들이 오랫동안 권력을 나눠 가졌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한 국가주의가 자리 잡았습니다. 부국강병의 목표는 곧 주변 나라를 향한 팽창으로 이어졌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습니다. 우리가 메이지 유신을 배울 때 근대화의 성공 사례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무라이가 사무라이를 없앤 혁명이라는 말은 멋지게 들리지만 그 뒤에는 칼을 잃고 가난해진 수많은 사람들과 침략을 당한 이웃 나라의 아픔이 함께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을 이루었는지와 함께 무엇을 희생시켰는지도 같이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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