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제독의 흑선(Perry Black Ships), 대포 앞에서 200년 쇄국을 끝낸 일본 개항의 순간

1853년 여름 에도 앞바다에 검은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1853년 7월 8일 지금의 도쿄만 입구인 우라가 앞바다에 낯선 배 네 척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돛도 펴지 않았는데 바람을 거슬러 미끄러지듯 다가왔고 굴뚝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습니다. 배 옆구리에는 거대한 대포들이 줄지어 해안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바닷가에 모여든 사람들은 저것이 배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어 떨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이 배를 흑선 즉 구로후네라고 불렀습니다.

이 함대를 이끈 사람이 바로 미국 해군의 매슈 페리 제독입니다. 페리 제독의 흑선은 단 몇 척의 군함으로 200년 넘게 굳게 닫혀 있던 일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니 두드렸다기보다 대포를 앞세워 문을 밀어젖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불과 15년 만에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됩니다.

오늘은 페리 제독의 흑선이 왜 일본에 왔는지 그리고 대포 외교가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에는 같은 시기 조선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도 함께 비교해 보겠습니다. 흑선 이야기는 일본만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근대사의 출발점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00년 넘게 문을 닫아걸었던 나라 일본

페리 제독의 흑선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일본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에도 막부는 1630년대 무렵부터 쇄국이라 불리는 정책을 폈습니다. 크리스트교가 퍼지는 것을 막고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은 함부로 외국에 나갈 수 없었고 외국 배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가사키의 작은 인공섬 데지마에서는 네덜란드와 무역을 했고 중국 상인들도 드나들었습니다. 조선과는 쓰시마를 통해 교류했고 류큐나 아이누와도 관계를 이어 갔습니다. 하지만 서양 나라 가운데 일본과 거래할 수 있는 나라는 네덜란드 하나뿐이었습니다.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바깥 세계의 소식을 조금씩 전해 들을 뿐이었습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와 영국의 배들이 일본 근해에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막부는 외국 배를 쫓아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840년 아편전쟁에서 거대한 청나라가 영국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막부 안에서도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서양의 군사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막부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뚜렷한 대비를 하지 못했고 결국 흑선이 에도 코앞까지 들어오는 날을 맞게 됩니다.

페리 제독은 왜 일본까지 왔을까요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토록 일본의 문을 열고 싶어 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태평양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영토를 넓혔고 태평양 건너 중국과의 무역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증기선이 태평양을 건너려면 중간에 석탄과 물과 식량을 채울 항구가 꼭 필요했습니다. 지도를 펼치면 그 자리에 딱 일본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고래잡이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기계에 기름칠을 했습니다. 미국 포경선들은 일본 근해까지 와서 고래를 잡았는데 배가 난파해 일본 해안에 닿으면 선원들이 붙잡혀 험한 대우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표류한 선원을 보호받고 배가 쉬어 갈 수 있는 항구를 원했습니다.

사실 미국은 페리보다 앞서 1846년에 제임스 비들 제독을 보내 일본에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들은 정중하게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실패를 잘 알고 있던 페리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관한 책과 자료를 꼼꼼히 공부했고 부드러운 부탁이 아니라 힘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협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페리는 일본에 오기 전 류큐 왕국에 먼저 들러 군사력을 과시하며 사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품고 에도만으로 향했습니다.

대포를 앞세운 협상 흑선 쇼크의 시작

막부 관리들은 흑선을 향해 외국과의 일은 나가사키에서만 다룬다며 그쪽으로 가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페리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는 군함을 에도 쪽으로 더 밀고 들어가 대포를 해안 마을로 향하게 했습니다. 페리의 군함에는 폭발하는 포탄을 쏘는 최신식 대포가 실려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친서를 받지 않으면 무력을 쓰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에도 성안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에도 사람들은 전쟁이 나는 줄 알고 짐을 싸서 피난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증기선이 한 척도 없었습니다. 바람 없이 움직이는 배를 처음 본 사람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이때 에도에서는 흑선 소동을 비꼬는 재치 있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비싼 녹차 이름과 증기선의 발음을 엮어서 태평한 잠을 깨운 네 잔 때문에 밤에도 잠을 못 이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우스갯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무기력한 막부를 향한 백성들의 불안과 조롱이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 막부는 페리가 구리하마에 상륙해 친서를 전달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페리는 내년에 답을 들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막부는 그사이 에도만 시나가와 앞바다에 오다이바라 불리는 포대를 서둘러 쌓았습니다. 지금 도쿄의 관광지 오다이바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흑선이 떠난 직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막부는 더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다시 돌아온 흑선과 가나가와 조약

페리 제독의 흑선은 약속보다 빠른 1854년 2월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두 배 가까운 군함을 이끌고 왔습니다. 첫 방문 때 에도만의 바닷길을 미리 측량해 두었기 때문에 함대는 훨씬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막부는 회담 장소를 에도에서 최대한 멀리 잡으려 했지만 페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협상이 막히자 그는 함대를 에도 쪽으로 더 전진시켰습니다. 궁지에 몰린 막부가 결국 회담 장소로 고른 곳이 당시 한적한 어촌이던 요코하마였습니다.

1854년 3월 31일 양국은 미일화친조약 흔히 가나가와 조약이라 부르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시모다와 하코다테 두 항구를 열어 미국 배에 석탄과 물과 식량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표류한 미국 선원을 보호하고 시모다에 미국 영사가 머물 수 있게 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더 좋은 조건을 주면 미국에도 똑같이 준다는 최혜국 대우도 들어갔습니다. 이것으로 200년 넘게 이어진 일본의 쇄국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이 조약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곧이어 영국과 러시아와 네덜란드도 비슷한 조약을 맺었습니다. 1858년에는 미국 총영사 해리스의 압박 속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본격적인 무역이 시작되었지만 외국인이 일본에서 죄를 지어도 일본 법으로 재판할 수 없는 영사재판권이 인정되었고 일본은 관세를 스스로 정할 권리도 잃었습니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막부의 로주 아베 마사히로는 흑선 문제를 두고 전국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막부가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의견을 구한 것 자체가 막부의 권위가 약해졌다는 증거였습니다. 이후 천황을 받들고 외국을 몰아내자는 존왕양이 운동이 거세졌고 결국 1868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페리 제독의 흑선이 떨어뜨린 작은 돌멩이가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킨 셈입니다.

같은 시기 조선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요

흑선이 일본을 흔들던 1850년대 조선은 철종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조선 바다에도 이양선이라 불린 서양 배가 자주 나타났지만 세도 정치로 조정은 흔들렸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했습니다. 이후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났고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벌어졌습니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 정책으로 맞섰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항 후 서양을 배운 일본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흑선과 같은 방식의 함포 외교를 펼쳤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흑선이 깨운 일본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페리 제독의 흑선은 흔히 일본을 잠에서 깨운 사건으로 불립니다. 실제로 흑선 이후 일본은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 국가로 변신했습니다. 요코하마와 하코다테는 국제 항구 도시로 성장했고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흑선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대포를 들이대고 조약을 맺게 한 방식은 명백한 강압이었고 그 결과는 일본이 수십 년 동안 바로잡으려 애쓴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더 씁쓸한 것은 강압으로 문을 연 일본이 그 방식을 그대로 배워 이웃 나라에 되풀이했다는 사실입니다. 흑선의 충격은 일본을 깨웠지만 동시에 힘이 곧 정의라는 제국주의의 논리도 함께 심어 놓았습니다.

페리 제독의 흑선 이야기는 변화의 파도를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얼마나 크게 갈리는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파도가 결국 우리 땅까지 밀려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흑선은 먼 이웃 나라의 이야기로만 넘길 수 없는 우리 근대사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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