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의 시대, 신하가 군주를 베는 찬탈(Usurpation)의 일상화

학교에서 반장이 선생님을 몰아내고 교실을 차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상상만 해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2700년 전 중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이나 벌어졌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쫓아내거나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이른바 일상이 된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아래가 위를 이긴다는 뜻으로 하극상이라 불렀습니다. 이 글에서는 춘추시대에 하극상이 어떻게 퍼졌는지 대표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춘추시대에는 군주를 죽이는 일이 얼마나 흔했을까?

사마천은 사기에서 춘추 242년 동안 군주를 죽인 일이 서른여섯 번 나라가 망한 일이 쉰두 번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이 숫자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세기도 하지만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평균을 내면 몇 해에 한 번꼴로 어느 나라에선가 임금이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한 셈입니다.

초기 사례로 위나라의 일이 있습니다. 기원전 719년 무렵 위나라 공자 주우가 이복형인 환공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집니다. 이때 원로 석작은 자신의 아들이 주우와 어울렸다는 이유로 아들까지 처벌했다고 합니다. 가족보다 나라의 질서를 앞세운다는 뜻의 대의멸친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극상이 벌어지던 때에도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붓으로 권력에 맞선 사관 형제들은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까?

가장 유명한 사건은 기원전 548년 제나라에서 벌어졌습니다. 제나라 장공이 대신 최저의 아내와 가까이 지내다가 최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최저는 장공의 아우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 자신이 재상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신하가 군주를 제거하고 권력을 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저가 더 두려워한 것은 역사의 기록이었습니다. 제나라의 사관이 최저가 임금을 시해했다고 적자 최저는 그를 처벌했습니다. 사관의 동생이 같은 문장을 이어 적자 또 처벌했고 셋째 동생까지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넷째 동생이 다시 같은 문장을 적자 최저는 마침내 포기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른 지방의 사관이 소식을 듣고 죽간을 들고 달려왔다가 이미 기록되었음을 알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권력은 사람을 죽일 수 있어도 기록은 막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노나라 제나라 진나라에서 권력은 어떻게 신하에게 넘어갔을까?

하극상이 가장 크게 일어난 곳은 큰 나라들이었습니다.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서는 계손 숙손 맹손이라는 세 귀족 가문이 오랫동안 실권을 쥐었습니다. 기원전 517년 무렵 소공이 이들과 맞서려다 실패하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고 전해집니다. 임금이 있어도 나라의 실제 주인은 신하였습니다.

제나라에서는 전씨 가문이 서서히 힘을 키웠습니다. 전씨는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줄 때 큰 말로 내주고 거둘 때는 작은 말로 받아 민심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기원전 481년 무렵에는 전상이 임금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고 결국 기원전 386년 전씨가 정식으로 제후의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를 전씨가 제나라를 대신했다는 뜻으로 전씨대제라 부릅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진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진나라는 여러 가문이 실권을 나눠 가졌는데 이 가운데 한 조 위 세 가문이 가장 힘센 가문 지백을 무너뜨리고 땅을 나눠 가졌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03년 주나라 왕이 이 세 가문을 정식 제후로 인정했습니다. 이 일을 삼가분진이라 하며 흔히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극상이 마침내 제도로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왜 하극상은 일상이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주나라는 왕이 제후를 정하고 제후가 신하를 다스리는 봉건 질서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힘을 잃자 제후들이 왕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고 제후 아래의 귀족인 경대부들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위에서 질서를 잡아 줄 존재가 사라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하의 힘이 커졌다는 점입니다. 경대부들은 자기 영지와 군대와 백성을 거느렸고 일부 가문은 임금보다 더 많은 재산과 병력을 가졌습니다. 세 번째는 후계 문제였습니다. 맏아들이 잇는다는 원칙이 흔들리며 형제 사이의 다툼이 잦았고 신하들은 어느 쪽에 서느냐로 권력을 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철기가 보급되고 농업 생산이 늘면서 경제력의 중심이 바뀐 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새로 부를 쌓은 가문이 기존 군주보다 힘이 세지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공자는 이 혼란을 어떻게 기록하고 대응했을까?

공자는 이런 혼란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긴 사람입니다. 그는 노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춘추를 쓰며 시해와 찬탈 같은 사건을 정확히 기록하고 이를 비판하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짓자 반역을 일삼는 신하와 못된 자식들이 두려워했다고 말했습니다. 칼이 아니라 붓으로 질서를 지키려 한 것입니다. 이런 서술 방식을 춘추필법이라 부릅니다.

공자가 내세운 정명 사상도 이와 닿아 있습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말은 하극상 시대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소가 현실의 칼날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이상과 시대가 가던 방향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우리 땅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중원이 하극상으로 흔들리던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무렵 한반도는 청동기 시대 후기였습니다. 대형 고인돌은 큰 힘을 가진 지배층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비파형동검은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로 거론됩니다. 사회 안에서 계층이 나뉘며 우두머리가 생겨나던 시기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문헌 기록이 없어 권력 다툼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기 어렵습니다.

하극상은 파괴였을까 아니면 새 시대의 시작이었을까?

하극상은 분명 폭력과 혼란을 낳았습니다. 군주가 죽고 가문이 무너지며 가장 큰 피해는 힘없는 백성에게 돌아갔습니다. 기록된 사건들도 대부분 사관의 시선으로 쓰였기에 그 이면의 사정은 더 복잡했을 수 있습니다. 사기가 정리한 숫자도 정확한 통계라기보다 혼란을 강조한 표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하극상을 단순한 나쁜 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신분이 낮아도 능력만 있으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퍼졌고 관중처럼 포로에서 재상이 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오래된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서 능력 중심의 새로운 정치와 법가 사상이 자랐습니다. 결국 하극상은 낡은 세상이 끝나고 전국시대라는 새 시대가 열리는 신호였습니다. 다만 새 질서가 반드시 더 나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국시대의 전쟁은 훨씬 더 잔혹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질서가 흔들리는 때일수록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지 신중히 따져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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