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아침 중국 북쪽 도시 하얼빈의 기차역에 짧고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습니다. 일본 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쓰러졌고 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총을 쏜 사람은 서른 살의 조선 청년 안중근이었습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러시아어로 대한 만세를 외치며 스스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안중근의 총성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세계를 향해 던진 외침이었습니다. 오늘은 안중근이 어떤 사람이었고 왜 하얼빈까지 갔으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황해도 청년 안중근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사냥을 좋아했고 글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 안태훈은 지역에서 이름난 인물이었고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습니다. 안중근은 천주교 세례를 받아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얻었고 신앙은 평생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청년이 된 안중근은 나라가 점점 기울어 가는 모습을 보며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는 교육으로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믿어 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빼앗기자 글공부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안중근은 가족과 고향을 뒤로하고 더 큰 싸움에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사격 솜씨도 훗날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무예만 믿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책 읽기를 즐겼고 세계 정세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이 왜 어려움에 빠졌는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용기와 생각을 함께 갖춘 청년이었기에 그의 선택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연해주로 간 안중근은 왜 손가락을 잘랐을까요
1907년 안중근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는 일본에 맞서 싸우려는 의병과 동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의병 부대의 참모중장을 맡았고 1908년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일대로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병력과 무기가 부족한 의병은 큰 패배를 겪었고 안중근도 간신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열두 명이 함께 연해주에서 단지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들은 왼손 넷째 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글씨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맹세였습니다. 안중근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연해주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의병 활동에 필요한 돈과 무기는 늘 모자랐고 일본의 감시도 심했습니다. 그래도 그곳의 동포들은 주머니를 털어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안중근이 홀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바람이 한곳에 모인 결과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거사의 계기가 됐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여전히 일본 정치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이토가 1909년 10월 러시아의 대신과 만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안중근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우덕순 그리고 조도선과 함께 계획을 세웠습니다. 젊은 청년 유동하도 러시아어 통역 등으로 이들을 도왔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기다리기로 했고 우덕순과 조도선은 다른 역에서 대기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습니다. 안중근이 이토를 직접 겨냥한 이유는 개인의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해친 인물이라는 판단 아래 이 일을 계획했다고 훗날 법정에서 밝혔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그날 아침 하얼빈역에는 러시아 군대가 의장대를 서며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양복 차림으로 역 안에 들어가 사람들 틈에 섞였습니다.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이토를 태운 열차가 도착했고 이토는 러시아 관리들과 인사를 나누며 걸어 나왔습니다.
안중근은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가 권총을 꺼내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일행 몇 명도 총에 맞아 다쳤습니다. 이토는 쓰러져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안중근은 총을 쏜 직후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를 외쳤습니다. 우라는 만세라는 뜻입니다. 곧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된 그는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소식은 순식간에 세계로 퍼졌습니다. 일본에서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이토의 장례는 국가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한편 한국 안팎의 많은 사람은 이 거사를 두고 나라를 빼앗긴 겨레의 뜻이 터져 나온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얼빈역 바닥에는 지금도 안중근이 서 있던 자리와 이토가 쓰러진 자리를 표시한 표지가 남아 있습니다.
뤼순 법정에서 안중근은 무엇을 이야기했을까요
체포된 안중근은 일본 관할의 뤼순으로 옮겨져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을 평범한 살인범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전쟁 중에 적의 우두머리를 처단한 군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포로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이토의 죄로 한국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한 일과 을사늑약을 강요한 일 등 열다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은 일본이 정한 결론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변호 기회는 크게 제한되었고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안중근은 항소하지 않았고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쓰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동양평화론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해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문장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입니다. 사형을 앞둔 사람의 글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차분하고 단단한 필체로 평가받습니다. 간수들 가운데에도 그의 인품에 감동해 글씨를 부탁한 이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안중근의 거사가 있던 1909년 한국은 이미 일본의 손에 거의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해 7월 기유각서로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9월에는 호남 의병을 탄압하는 남한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안중근의 거사 이후 한국에서 병합을 서둘렀고 이듬해 8월 대한제국은 끝내 나라를 잃었습니다.
안중근의 총성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안중근은 우리에게 의사로 불립니다. 의사는 무력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이 병합을 앞당겼다는 평가도 있지만 일본은 이미 1909년 여름에 병합 방침을 정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안중근의 행동이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입니다.
안중근의 의미는 총을 쏜 순간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가 구상한 동양평화론에는 뤼순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함께 관리하는 평화의 거점으로 삼고 공동 은행과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지역 협력을 떠올리게 하는 놀라운 발상으로 평가받습니다.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고 사형을 앞두고도 평화를 이야기한 모습이 그를 더욱 깊이 기억하게 만듭니다. 중국에서도 그를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가 있어 2014년 하얼빈역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하얼빈의 총성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간단합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이 안중근을 처음 만나는 분들께 작은 길잡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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