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키다, 백제의 영웅 계백: 황산벌 전투와 결사대의 투혼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패배 속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백제의 마지막을 지킨 충신 계백 장군이 바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그는 멸망 직전의 백제를 구하기 위해 오천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라의 대군에 맞섰고,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며 백제의 마지막 혼을 불태웠습니다. 비록 백제는 멸망했지만, 계백 장군과 결사대의 투혼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동과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오늘은 백제의 운명을 건 마지막 전투, 황산벌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풍전등화의 백제와 계백의 등장

7세기 중엽, 백제는 의자왕의 치세(나라를 다스리는 기간) 말년에 이르러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고구려와의 전쟁과 신라에 대한 잦은 공격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왕실과 귀족 간의 갈등으로 내부적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이 틈을 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660년, 마침내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향해 진격해 왔습니다.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대군은 해로를 통해 백강(금강 하구)으로 향했고,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탄현(炭峴, 지금의 대전과 옥천 사이 고개)을 넘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백제 조정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 소식에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의자왕은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지만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백제의 운명을 짊어지고 나선 인물이 바로 달솔(達率, 백제의 22관등 중 두 번째 높은 관직) 계백이었습니다.

비장한 결단: 오천 결사대 조직

계백은 멸망을 눈앞에 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의자왕으로부터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군을 막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5천 명의 병력으로는 5만 명에 달하는 신라군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승리보다는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산화(목숨을 바쳐 흩어짐)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출정(싸움터로 나아감)에 앞서 계백은 차마 상상하기 힘든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자신의 처자식들을 스스로 죽입니다. "살아서 적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영원한 편안함을 얻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자신이 죽음으로써 백제 병사들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오직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만 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독하리만큼 비장한 결의는 5천 결사대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계백은 병사들에게 "옛날 월나라 왕 구천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대군을 무찔렀으니, 우리도 힘을 다해 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독려하며 마지막 투혼을 불태웠습니다.

황산벌에서의 처절한 사투(死鬪)

계백은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일대)로 향했습니다. 황산벌은 사비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넓은 평야로,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군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였습니다. 계백은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여 세 곳에 진영을 구축하고 신라군을 기다렸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백제군을 공격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으로 신라군을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백제군은 신라군의 공격을 네 번이나 막아내며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신라군은 예상치 못한 백제군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했고,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때 신라군은 백제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사기를 꺾기 위해 화랑(신라의 청소년 수련 조직)들을 이용한 전술을 펼쳤습니다. 김유신의 조카인 화랑 반굴, 그리고 화랑 관창이 백제 진영으로 뛰어들어 전사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린 화랑들의 죽음은 신라군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렸고,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보다 더욱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계백의 장렬한 최후와 백제의 멸망

결국 수적으로 열세였던 계백의 결사대는 신라군의 끊임없는 공격과 화랑들의 희생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제군 5천 결사대는 마지막 한 명까지 남아 치열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신라군의 물량 공세를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계백 장군 또한 백제 병사들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 황산벌에서 전사했습니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에게 있어 마지막 방어선이었습니다.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전멸하면서, 신라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사비성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육로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수로로 사비성에 합류하여 백제의 수도를 포위했습니다. 결국 백제의 의자왕은 항복하고, 백제는 660년 멸망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계백과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의미

계백 장군과 황산벌 전투는 비록 백제의 패배로 끝났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백제 최후의 충절을 상징합니다. 계백은 이미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며, 이는 백제인들의 강인한 정신과 충성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둘째, 나당 연합군의 백제 정복 과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습니다. 계백의 결사대는 비록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나당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습니다.

셋째, 한국 전쟁사에 길이 남을 비장한 투혼을 보여주었습니다. 계백의 비장한 결단과 5천 결사대의 용맹함은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나라를 지키기 위한 희생정신의 본보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영원히 기억될 영웅의 이름

계백 장군과 황산벌 전투는 패배했지만,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백제사의 한 페이지를 넘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영웅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망국의 장수였지만,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던 충성스러운 인물로 추앙받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의 뜨거운 정신을 기억하며, 역사의 소중한 교훈을 되새기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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