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 혼란한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다

한반도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10세기 초는 신라의 오랜 지배가 저물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각지에서 일어난 호족(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유력자) 세력이 성장하고, 결국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등장하면서 한반도는 다시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 혼란의 시대를 종결하고 통일 왕조 고려를 세운 인물이 바로 왕건입니다. 그는 어떻게 분열된 땅을 하나로 모아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과 후삼국의 등장

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의 왕위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가뭄과 흉년이 겹치면서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곳곳에서 도적 떼가 들끓고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지방의 호족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견훤궁예였습니다.

견훤은 상주(지금의 경상북도 상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 그는 신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한편, 신라 왕실의 후예라고 자처한 궁예는 강원도 철원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 901년 송악(지금의 개성)에 후고구려를 세웠습니다. 궁예는 민심을 얻는 데 능했으며, 특히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북방 세력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신라를 포함한 후삼국이라는 새로운 정세가 펼쳐지게 됩니다.

왕건의 등장과 고려 건국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부하 중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왕건이었습니다.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성) 출신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성장한 호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궁예의 신임을 받아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나 궁예는 점차 폭정을 일삼고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전횡을 휘둘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부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신하들이 왕건을 추대(높여 모시는 것)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왕건은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왕건은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지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도읍을 자신의 고향인 송악으로 정하고,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을 펼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나갔습니다.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대립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의 가장 큰 과제는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삼국 시대의 주도권은 사실상 후백제와 고려의 대결 구도로 흘러갔습니다.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를 압박해왔습니다. 927년, 후백제는 신라의 수도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주를 약탈했습니다. 이때 신라를 구원하러 간 왕건은 공산 전투(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배하여 많은 장수들을 잃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신숭겸 등 충신들의 희생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얻는 데 주력했습니다. 후백제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이용하고,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또한, 뛰어난 전략으로 후백제군을 교란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후백제의 후방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930년 고창 전투(지금의 안동)에서는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고려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내분

고창 전투 이후 신라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국가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은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경순왕은 왕건에게 정중히 항복 의사를 표명했고, 왕건은 경순왕과 신라 귀족들을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신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의 평화적인 항복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왕건의 관용적인 정책은 훗날 고려의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편, 후백제에서는 견훤의 아들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다른 아들들이 이에 반발했습니다. 결국 맏아들 신검을 비롯한 아들들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견훤은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했고, 왕건은 견훤을 환대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후백제의 이러한 내분은 고려에게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견훤이 고려에 투항한 직후, 왕건은 후백제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총공세에 나섰습니다. 936년, 왕건은 견훤과 함께 대규모 고려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수도 전주로 진격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일선리 전투(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일대)입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후백제의 주요 장수들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후백제는 급격히 무너져 내렸고, 결국 신검은 왕건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왕건은 936년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완성했습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호족들을 회유(달래어 마음을 돌리게 함)하고, 통합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지방 호족들에게 토지와 관직을 주고, 그들의 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혼인 정책을 펼치는 등 유화적인 정책을 통해 호족 세력을 흡수했습니다. 또한, 세금 부담을 줄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불교를 숭상하여 민심을 통합했습니다.

고려 통일의 의미와 역사적 의의

왕건이 이룩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단순한 영토 통일을 넘어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통일 신라 이후 분열되었던 한반도가 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됨으로써 민족의 재통합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신라 중심의 귀족 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 호족 세력을 포용하여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셋째, 민족 고유의 문화와 사상을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고려는 한민족의 역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위대한 왕조였습니다. 왕건의 뛰어난 리더십과 포용력은 혼란했던 후삼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년 왕조 고려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코리아(Korea)'라고 부르는 이름의 뿌리가 바로 '고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후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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