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의 죽음 이후 불안정한 사회와 광종의 즉위

고려를 건국하고 혼란스러웠던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태조 왕건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훈요 10조를 남기며 고려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고려 사회는 태조가 구축한 기반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불안정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태조가 남긴 많은 자녀와 호족(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유력자) 세력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이는 결국 왕실의 혼란과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왕권을 강력하게 확립하고 고려의 기틀을 굳건히 다진 인물이 바로 광종입니다.

태조 사후, 불안정한 왕권과 호족들의 갈등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여러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로 인해 태조에게는 29명의 부인과 수많은 자녀가 있었는데, 이는 태조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태조는 장자인 혜종(재위 943~945)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혜종은 즉위 초부터 왕권이 불안정했습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다른 왕자들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견제가 심했고, 특히 외척(왕의 외가 친척) 세력의 발호(위세를 부려 마구 날뛰는 것)가 심각했습니다.

혜종의 불안정한 왕권은 결국 왕규의 난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왕규는 태조의 부인이자 혜종의 외조부였는데,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혜종을 시해하려 했습니다. 다행히 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는 당시 왕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혜종은 불안감 속에서 2년 만에 재위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혜종의 뒤를 이어 태조의 셋째 아들인 정종(재위 945~949)이 즉위했습니다. 정종 역시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서경(평양) 천도를 추진하며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이 또한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정종 역시 재위 4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처럼 태조의 죽음 이후 고려 초기는 혜종과 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호족 세력의 힘이 강했던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기였습니다.

광종의 즉위와 은둔의 시간

이러한 혼란 속에서 949년,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인 왕소, 즉 광종(재위 949~975)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광종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세력 기반이 약했습니다. 주변에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호족들과 공신(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운 신하) 세력이 즐비했고, 그의 형인 혜종과 정종이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불안정한 왕권을 경험했기에 광종 역시 즉위 초에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광종은 즉위 초 7년 동안 이렇다 할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않고, 오히려 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때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온건한 정책을 펼치며 호족들의 경계를 풀게 했습니다. 이 시기는 광종이 자신의 세력을 은밀히 규합하고, 고려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며 개혁의 시기를 모색했던 준비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오대 십국(중국이 여러 왕조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웠던 시기) 상황을 주시하며 고려 내부 개혁의 적기임을 판단했습니다.

광종, 개혁의 칼날을 꺼내다: 왕권 강화 정책

광종은 철저한 준비 기간을 거친 후, 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 확립을 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개혁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원래의 신분인 양인(자유민으로 세금을 내고 군역을 지는 계층)으로 되돌려주는 법입니다. 당시 호족들은 전쟁 포로를 노비로 삼거나 백성들을 억압하여 노비로 만들고, 이들을 사병(개인적인 군사)으로 활용하거나 노동력으로 착취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이러한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세금과 군역을 부담할 양인을 늘려 국가 재정과 군사력을 확충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호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광종은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왕권 강화의 중요한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둘째, 과거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958년, 중국 후주(五代十國 중 하나)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했습니다. 과거 제도는 혈통이나 가문이 아닌, 시험을 통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호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벗어나, 왕에게 충성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육성하여 왕권의 친위 세력으로 삼으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과거 제도의 실시는 고려의 정치 체제를 중앙 집권적인 관료 체제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후 고려 사회의 인재 등용 시스템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셋째, 공복 제정칭제건원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광종은 문무 관리의 복색(옷의 색깔)을 자주(자줏빛), 단(붉은색), 비(자주색), 녹(녹색)의 네 가지 색으로 정하여 관료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통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인 광덕(光德)과 준풍(峻豊)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자주적인 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으로, 왕권의 절대적인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개경을 '황도'(황제의 도읍), 서경을 '서도'라 칭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호족 숙청과 왕권 전제화

광종은 이러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거나 왕권에 위협이 되는 호족 세력들을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즉위 초 은인자중(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지내는 것)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강력하고 냉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반대파들을 반역죄로 다스리거나 귀양 보내고, 심지어는 살해하는 등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숙청으로 인해 고려 초 건국 공신 세력의 상당수가 제거되었으며, 왕권에 도전할 만한 세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피를 흘린 과정이었지만, 이러한 숙청을 통해 광종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고려의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광종의 불교 정책과 역사적 평가

광종은 불교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통합하려는 정책도 펼쳤습니다. 승려들의 위상을 높이고, 승과(승려를 선발하는 시험)를 실시하여 승려들의 자질을 높였습니다. 또한, 사찰을 건립하고 불교 행사를 장려하는 등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적극 활용했습니다.

광종의 통치는 고려의 초기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강압적인 숙청으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혼란했던 시기에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고 안정기를 이끌어낸 점은 광종이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군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면, 광종은 그 고려를 진정한 국가다운 국가로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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