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는 삼국시대를 지나 남북국시대로 이어집니다. 한반도 남쪽에는 통일 신라가, 북쪽에는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를 이어받은 발해가 당당히 존재했죠. 발해는 고구려 유민(남아있는 백성)과 말갈족(만주 지역의 여러 종족 중 하나)이 함께 세운 나라로, 드넓은 만주 벌판을 지배하며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당나라는 발해를 '해동성국(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이라 부를 정도로 그 위세를 인정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그들이 남긴 정신과 문화를 계승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운 발해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자랑스러운 기록입니다. 과연 발해는 어떻게 건국되어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을까요?
고구려 유민들의 염원, 발해의 건국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의 영주(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부흥의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696년, 영주에서 거란족 추장 이진충이 당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 고구려 유민을 이끌던 걸걸중상과 말갈족을 이끌던 걸사비우는 함께 영주를 탈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의 추격은 매서웠고,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고구려의 옛 장수였던 대조영이 남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험준한 동모산(지금의 지린성 둔화시)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698년,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독립을 굳건히 하였고, 마침내 '진국(震國)'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이후 713년, 당나라 현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면서 공식적으로 국호를 '발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만주 지역까지 확장시킨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발해의 발전과 번영, 해동성국을 이루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안정과 발전을 꾀했습니다. 2대 무왕(재위 719~737)은 당나라에 대한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며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특히 당의 등주를 공격하는 등 대외적으로 강인한 모습을 보였고, 북만주 지역의 여러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3대 문왕(재위 737~793) 시기에는 발해의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문왕은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앙 관제와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유교 교육을 장려하여 국가 체제를 안정시켰습니다. 또한 일본, 신라와도 활발하게 교류하며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을 갖추고, 수도 상경 용천부를 중심으로 도로망을 정비하여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했습니다.
발해의 독자적인 통치 체제
발해는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이를 독자적으로 변형하여 발해만의 통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중앙 정치 조직은 3성 6부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당의 3성 6부제와는 그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3성: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중 정당성은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기구로, 그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이 국정을 총괄했습니다. 이는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지만, 발해는 정당성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 중심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선조성은 황제의 명령인 조칙(詔勅)을 심의하고 반박하는 역할을 했으며, 중대성은 국가의 입법 사무와 정책 수립을 관장했습니다.
6부: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의 6부(이, 호, 예, 병, 형, 공)와 달리, 발해는 유교적 덕목을 나타내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정당성 아래에 좌사정(左司政)이 충부, 인부, 의부를, 우사정(右司政)이 지부, 예부, 신부를 각각 관할하는 이원적인 체제를 갖추어 행정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 외에도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담당하는 문적원, 중앙 최고 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을 두어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지방 행정은 5경 15부 62주 체제로 이루어졌습니다. 5경은 수도 상경을 비롯한 중요한 정치, 경제,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었고, 각 부 아래에는 여러 주를 두었습니다. 특히 지방의 말단 행정 구역인 촌락은 고구려인과 말갈족 토착 세력에 의해 다스려져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인 10위를 중심으로 왕궁과 수도를 방어했으며, 지방에는 국경이나 주요 요충지에 별도의 군대를 배치하여 국방력을 강화했습니다.
발해의 문화와 대외 관계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고구려의 기상과 웅장함이 느껴지는 건축물, 불상, 벽돌 무덤 등은 발해의 예술적 수준을 보여줍니다. 특히 정혜공주묘와 정효공주묘는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당의 영향을 받은 벽화가 나타나 발해 문화의 융합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대외적으로 발해는 당, 신라, 일본 등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습니다. 당과는 견제와 교류의 양면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발해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당의 문물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신라와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신라도(新羅道)를 개설할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활발한 외교와 무역을 진행했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보내는 편지)에는 발해 스스로를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한 나라'라고 밝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했습니다.
발해의 멸망과 그 의미
번성했던 발해도 9세기 후반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잦은 왕위 다툼과 귀족들의 권력 투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내부적으로 지배층인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인 말갈인 사이의 갈등도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세기 초, 만주 지역에서 급성장한 거란족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대군에 의해 발해는 갑작스럽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발해는 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졌지만, 그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광활한 만주를 지배하며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을 넓혔고, 통일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이루어 민족사의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발해의 독자적인 통치 체제와 문화는 우리 민족의 저력과 뛰어난 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고구려 계승 의식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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