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항전
몽골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약 28년간(일부 견해는 1270년까지 약 40년) 총 6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은 고려 전체를 초토화시켰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백성들은 약탈과 학살, 포로로 끌려가는 등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특히 2차 침입 때 소실된 초조대장경은 고려 문화의 큰 손실이었습니다.
몽골의 1차 침입이 시작되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는 몽골군의 강력한 기동력을 피하고 장기 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습니다.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몽골의 약점인 해군력으로는 공격하기 어려웠기에 천연 요새의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항전을 이어갔고, 육지에서는 백성들과 승려들이 몽골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대표적인 항전으로는 1232년 몽골 장수 살리타이(살리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처인성(현재 경기도 용인)을 공격했을 때, 김윤후(승려 출신으로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한 인물)가 이끄는 백성들과 승려들이 합심하여 몽골군을 물리치고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 전투가 있습니다. 또한, 몽골의 5차 침입(1253년) 때는 김윤후가 다시 한번 충주성에서 노비와 백성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항전하여 성을 지켜냈습니다. 이처럼 고려의 백성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력은 쇠퇴하고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고려 조정 내부에서는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1259년(고종 46년) 고려는 몽골과 강화(和議, 평화 협상)를 맺게 됩니다. 이로써 약 30여 년간 이어진 고려-몽골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고, 고려는 몽골에 복속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삼별초의 항쟁: 무신 정권의 군대에서 자주국의 수호자로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자 정예 부대였습니다. 야별초(도적을 잡기 위해 조직),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자들로 구성)으로 이루어진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사병 역할을 하며 권력을 수호했습니다. 몽골과의 전쟁 중에도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명령에 따라 대몽 항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를 맺고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수도를 다시 원래 자리로 옮기는 것)를 결정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삼별초는 고려 왕실의 개경 환도와 몽골과의 강화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들의 반대 이유는 복합적이었습니다.
첫째, 민족적 자존심과 항몽 정신: 삼별초는 몽골에 끝까지 저항했던 최씨 정권의 군사 조직이었기에, 몽골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민족적 수치이자 배신으로 여겼습니다. 둘째, 최씨 정권의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왕실이 몽골과 손을 잡는 것은 삼별초의 존재 기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몽골에 항복하면 자신들이 숙청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셋째, 자신들의 신분 및 기득권 유지: 몽골에 항복한 왕실이 무신 정권의 잔당인 자신들을 해체할 것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세력과 신분 유지를 위해서라도 항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배중손과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이어가기로 결정합니다.
삼별초의 해체 과정: 진도에서 제주까지
1270년, 삼별초는 고려 왕실의 개경 환도 명령을 거부하고 항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강화도를 거점으로 삼아 몽골-고려 연합군에 저항했습니다.
진도 항쟁 (1270년 8월 ~ 1271년 5월): 강화도에서 몽골-고려 연합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삼별초는 백성들과 함께 진도(전라남도에 위치한 섬)로 근거지를 옮겼습니다.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남해안 일대의 조운로(세곡을 운반하던 바닷길)를 장악하며 몽골과 고려 조정에 맞섰습니다. 이들은 일본에까지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몽골-고려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진도 용장성이 함락되었고, 배중손은 이때 전사했습니다. 승화후 온 또한 몽골군에게 사살당했습니다.
제주도 항쟁 (1271년 5월 ~ 1273년 4월): 진도가 함락되자, 김통정을 비롯한 남은 삼별초 세력은 제주도로 이동하여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제주도에 항파두리성을 쌓고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이미 상당한 병력을 잃은 삼별초는 수적으로 우세한 몽골-고려 연합군의 공세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1273년 4월, 항파두리성이 함락되면서 김통정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했고, 이로써 3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삼별초 해체의 역사적 의미
삼별초의 해체는 40여 년에 걸친 고려-몽골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의 역사에 깊은 의미를 남겼습니다.
첫째, 강력한 자주 의지의 표상: 삼별초는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거대한 몽골 제국에 끝까지 저항하며 고려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 했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고려인들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둘째, 무신 정권의 몰락과 왕권의 복원: 삼별초의 해체는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형식적으로나마 고려 왕권이 복원되고 문신들이 다시 중앙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고려는 몽골(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원 간섭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셋째, 하층민들의 참여: 삼별초 항쟁에는 단순히 무신들뿐만 아니라 농민, 노비 등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는 무신 정권기 농민, 천민 봉기에서 이어지는 하층민의 성장한 의식과 능동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삼별초의 마지막 불꽃은 비록 꺼졌지만, 그들의 끈질긴 항전은 몽골의 침략 속에서도 고려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며 고유한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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