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여 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끈질기게 버텨낸 고려는 결국 몽골(원나라)과 강화를 맺고 원의 간섭을 받는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는 자주적인 국가로서의 위상을 크게 잃고 원의 부마국(사위 나라)이자 제후국(작은 나라)으로 전락했습니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부르는데, 원나라는 고려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간섭했고, 이 과정에서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여 횡포를 부리며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또한, 고려의 최고 정치 기구였던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되며 그 위상과 역할이 크게 변모했습니다.
원의 내정 간섭: 굴욕적인 현실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면서 고려는 원의 강력한 간섭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원나라는 고려를 직접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왕실과 관제를 격하시키고 다양한 방식으로 내정에 간섭하며 고려를 사실상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었습니다.
관제 격하와 왕실 용어 변경: 원나라는 고려가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왕실과 관청의 명칭을 대폭 격하했습니다. 고려 국왕의 칭호는 '폐하'에서 '전하'로, 왕자들은 '태자'에서 '세자'로 낮아졌습니다. 왕의 시호(죽은 후에 붙이는 칭호)에는 반드시 '충(忠)'자가 들어가도록 강요하여,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를 담게 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2성 6부' 체제도 '첨의부'와 '4사' 등으로 축소되고 명칭도 격하되었습니다.
영토 상실과 직접 지배: 원은 고려 영토의 일부를 직접 지배했습니다. 화주(현재 함경남도 영흥) 이북의 땅에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 지역을 지배했으며, 서경(평양)에는 동녕부를,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고려 영토의 일부를 자신들의 땅으로 편입시켰습니다. 비록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나중에 고려에 반환되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에야 수복될 정도로 오랜 기간 원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정동행성(征東行省) 설치: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원정이 실패한 후에도 정동행성은 철수하지 않고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상설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정동행성의 이문소(理問所)라는 기구는 고려의 사법권에까지 개입하여 간섭하는 등 고려 주권을 침해하는 대표적인 기구였습니다.
인적, 물적 수탈: 원은 고려에 막대한 양의 공물(특산물)을 요구했습니다. 금, 은, 인삼, 비단, 매(사냥용 매) 등이 조공으로 바쳐졌고, 특히 고려의 매를 관리하는 응방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매 사냥을 강요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이 컸습니다. 또한, 고려의 젊은 여성들을 원나라 황실과 귀족들에게 보내는 공녀(貢女)와 환관(거세한 남자 노비) 요구는 백성들에게 크나큰 아픔과 비극을 안겨주었습니다. 왕자들은 원에 가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 새로운 지배층의 탐욕
원 간섭기 동안 고려 사회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세력이 바로 권문세족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존의 문벌 귀족 가문 중 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무신 집권기 이후 새롭게 성장한 친원(親元) 세력, 몽골어를 익혀 통역관이나 응방 관리로 출세한 이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권문세족은 원의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고위 관직 독점: 이들은 원의 비호 아래 최고 정치 기구인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국정을 농단(권력을 남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대농장 확대와 백성 수탈: 권문세족은 원의 세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대규모 농장을 확대했습니다.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남의 토지를 빌려 농사짓는 농민)으로 전락하거나 노비가 되는 등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불법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백성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키는 등 횡포를 부렸습니다.
음서 등 특권 유지: 기존 문벌 귀족의 특권이었던 음서 제도를 유지하고 확대하여 자신들의 자손들이 손쉽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능력보다는 가문과 배경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친원적인 행태: 몽골의 풍습인 변발(머리털 일부를 깎고 땋아 늘어뜨리는 머리 모양)과 호복(몽골식 의복)을 착용하고, 몽골어를 사용하는 등 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친원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는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백성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는 고려 사회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고려 말 사회 혼란의 주된 원인이 되었고, 훗날 신진 사대부들이 개혁을 추진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도병마사의 변화, 도평의사사
고려의 최고 합의 기관이었던 도병마사(都兵馬使)는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편되면서 그 성격과 역할이 크게 변모했습니다.
기존 도병마사의 성격: 도병마사는 원래 거란이나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국방 문제를 논의하는 임시 회의 기구였습니다. 중서문하성(최고 행정 기관)의 재신(宰臣, 재상)과 중추원(왕명의 출납과 군사 기밀 담당)의 추밀(樞密, 군사 기밀 담당 관리) 등 고위 관리들이 참여하여 국방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도평의사사로의 개편과 역할 변화: 충렬왕 때(원 간섭기 초)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었습니다. 명칭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 역할과 권한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기존의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인사, 재정, 법률 제정 등 국정 전반에 걸친 모든 중요 사항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최고 정치 기구로 발전했습니다. 사실상 고려 최고 의결 기관이자 행정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권문세족의 장악: 도평의사사는 그 중요성이 커지면서 권문세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핵심 기구가 되었습니다. 원의 비호를 받는 권문세족들이 도평의사사의 주요 직책을 독점하고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이는 왕권이 약화되고 특정 세력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는 원 간섭기 정치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도평의사사의 변화는 고려의 정치 체제가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성장에 따라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왕권은 약화되고, 원의 영향력 아래 놓인 권문세족들이 도평의사사를 통해 고려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원 간섭기는 고려에게는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예고하는 시기였습니다.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횡포는 고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는 훗날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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