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가장 총명하고 강력했던 개혁 군주 정조.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정조가 살아생전 쌓아 올렸던 개혁의 탑과 왕권 강화의 꿈은 마치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나랏일은 왕의 손을 떠나 특정 가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백성들의 삶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의 외척(外戚, 왕비의 친족)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勢道 政治)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너무 이른 개혁 군주의 죽음
1800년, 탕평책을 통해 붕당 정치를 안정시키고, 수원 화성을 건설하며 강력한 왕권을 꿈꾸던 정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고작 11살의 어린 아들, 순조(純祖)였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지략을 갖춘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겨우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어린 아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왕의 나이가 어리면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국정을 돌봐야 했고, 이 권력의 공백이야말로 세도 정치의 싹이 트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수렴청정, 권력의 문을 열다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두 번째 왕비)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정조의 개혁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보수적인 노론 벽파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정조가 신뢰했던 많은 신하를 내쫓고, 정조의 개혁 정책들을 하나둘씩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정조가 애써 막아놓았던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신유박해)를 일으켜 정약용 등 남인 계열의 개혁적인 인물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축출했습니다. 이는 권력의 문을 특정 세력에게 활짝 열어주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권력의 정점에 서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직접 정치를 시작했지만, 이미 권력의 추는 외척 가문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의 인물로, 자신의 딸이 왕비(순원왕후)가 되면서 국왕의 장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김조순을 시작으로 안동 김씨 일족은 조정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물론, 군사권을 쥔 훈련대장과 같은 핵심 요직을 독차지했습니다. 나라의 모든 권력이 왕이 아닌, 안동 김씨라는 특정 가문의 손에서 움직이는 기형적인 정치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도 정치의 폐해, 무너지는 나라의 기강
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자, 국정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매관매직(賣官賣職,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행위)이 성행했습니다. 능력이나 인품과 상관없이, 안동 김씨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친 자만이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은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습니다. 토지세, 군포, 환곡 등 국가의 세금 제도인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고,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 제도는 유명무실해졌고, 나라의 인재를 뽑는 공정한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나랏일은 안동 김씨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정되었습니다. 정조가 그토록 바로 세우려 했던 나라의 기강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개혁의 불꽃은 꺼지고, 민란의 불길이 타오르다
정조의 죽음 이후 시작된 약 60년간의 세도 정치 기간 동안, 조선은 안으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개혁의 희망은 사라지고, 오직 수탈과 부패만이 가득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분노는 마침내 거대한 저항으로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洪景來의 亂)은 세도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정조가 꿈꾸었던 부강한 나라는 온데간데없고, 조선은 거대한 민란의 불길 속에서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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