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 통치체제를 재정비하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안팎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는 수십 년간 이어진 세도 정치(勢道 政治)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삼정의 문란(三政의 紊亂)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밖으로는 정체불명의 서양 배들(이양선, 異樣船)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등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총체적 위기 상황 속에서, 어린 아들 고종을 대신해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입니다. 그는 썩어빠진 나라의 시스템을 뿌리부터 뜯어고치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대원군의 개혁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안동 김씨 같은 특정 가문이 독점하던 권력을 빼앗아 왕실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왕권 강화'. 둘째, 나라를 좀먹는 부정부패를 근절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민생 안정'. 그는 이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부패한 세도가들을 몰아내야만 백성을 위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 과제: 세도 정치의 뿌리를 뽑다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세도 정치의 핵심 기반을 무너뜨리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 인재의 고른 등용: 그는 특정 가문이나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인재라면 누구든 과감히 등용했습니다. 이는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던 기존의 관행을 깨뜨리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 비변사 혁파: 비변사(備邊司)는 본래 국방 문제를 논의하던 임시 기구였지만, 세도 정치 시기에는 행정과 군사 등 모든 국가 권력을 독점하는 최고 권력 기구로 변질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이 비변사의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결국 폐지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능에 맞게 정치는 의정부(議政府)에, 군사는 삼군부(三軍府)에 돌려주어 국가 통치 시스템을 정상으로 되돌렸습니다.

두 번째 과제: 나라의 좀벌레, 서원을 철폐하다

서원(書院)은 본래 지방의 선비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사를 지내던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당파 싸움의 근거지가 되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나라의 큰 골칫덩어리로 전락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를 과감히 정리했습니다. 전국의 600여 개에 달하는 서원 중,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해 버렸습니다. 이 조치로 국가 재정은 확충되었고, 백성을 괴롭히던 지방 양반들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유생들이 궁궐 앞에 엎드려 반대 상소를 올렸지만, 대원군의 개혁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 번째 과제: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습니다.

  • 전정(토지세): 관리들이 숨겨놓은 토지(은결)를 찾아내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 군정(군포): 양반에게는 군포를 면제해주던 불평등한 제도를 뜯어고쳤습니다. 그는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집집마다 군포를 내게 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여 조세의 공평성을 높였습니다.

  • 환곡(구휼 제도): 관리들의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되었던 환곡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마을 단위로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해 부정을 막았습니다.

경복궁 중건: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다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후 270년간 폐허로 남아있던 조선의 정궁,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짓는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무너진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강력한 의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 중건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막대한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기부금 형태의 원납전(願納錢)을 강제로 거두고, 화폐 가치가 낮은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키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쳐 큰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흥선 대원군의 국내 개혁은 강력한 추진력으로 세도 정치의 폐단을 청산하고 국가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록 경복궁 중건처럼 무리한 정책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개혁은 안으로부터 무너져가던 조선을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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