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첫 국가의 비극, 고조선 멸망과 한사군 설치의 진실

우리 역사의 첫 국가, 고조선은 한때 동아시아의 강력한 강자로 군림했습니다. 광활한 영토와 선진 문화를 자랑하며 수많은 부족 국가들을 아우르던 그 이름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떤 존재도 영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고조선 역시 대륙의 거대한 제국, 한나라와의 피할 수 없는 격돌 끝에 안타까운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은 고조선이 걸었던 마지막 길과 그 길 끝에 놓였던 한사군(漢四郡) 설치라는 역사적 전환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한반도 역사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고조선의 멸망, 그 비극적이지만 의미 깊은 순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대국 고조선, 위기 속으로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 경 위만(衛滿)이라는 인물이 집권하면서 더욱 강력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위만은 중국 진한 교체기의 혼란을 피해 고조선으로 넘어온 이주민 출신이었으나, 준왕(準王)의 신임을 얻어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력을 키워 결국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부터를 역사에서는 '위만조선'이라 부릅니다. 위만조선은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켰고, 주변의 여러 부족 국가들을 복속시키며 더욱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특히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으며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대륙의 강자 한(漢)나라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무제(武帝)라는 강력한 군주가 다스리던 시기로, 흉노(匈奴) 정벌에 성공하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벌이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고조선은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유지하며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류하는 것을 막는 등 한나라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특히 남쪽의 진국(辰國)이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려 하자 이를 저지하는 행동은 한나라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비춰졌습니다.

한나라의 침략, 피할 수 없는 전쟁

고조선의 이러한 움직임은 한나라 무제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제는 먼저 사신 섭하(涉何)를 고조선에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우거왕(右渠王, 위만의 손자)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섭하가 돌아가는 길에 고조선의 관리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나라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고조선을 침공했습니다. 육군과 수군을 동시에 파견하는 대대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초기 전쟁은 고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한나라의 대군 앞에 고조선은 수세에 몰렸지만, 예상외로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은 견고했으며, 고조선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왕검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지만, 1년여간의 공방전에도 불구하고 쉽게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한나라 내부에서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오갈 정도였습니다.

내부 분열이 부른 비극적 최후

그러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은 내부의 분열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내부에서는 한나라에 항복하려는 세력과 끝까지 저항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특히 재상 역계경(歷谿卿)과 같은 인물은 우거왕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내부 균열은 고조선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재상 성기(成己)를 제외한 핵심 대신들이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왕이 죽은 후에도 성기는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끝까지 항전하려 했습니다. 그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배신자에 의해 성기마저 살해당하며 왕검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이로써 단군조선 이래 약 2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고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고조선의 멸망은 한반도 북부에 오랜 기간 뿌리내렸던 자주적인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고조선 땅에 설치된 한사군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나라는 그 옛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기원전 108년에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습니다.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중 낙랑군은 고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현재의 평양 지역으로 추정)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한사군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고조선의 옛 땅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여 한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확보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이 지역에 전파하여 문화적 동화를 꾀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특히 낙랑군은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에는 중국의 관리들이 파견되어 직접 통치했으며, 한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시행하려 노력했습니다.

한사군의 변화와 저항

그러나 한사군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나라의 의도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사군, 특히 낙랑군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군(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은 토착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고조선 유민들과 주변 부족 국가들은 한나라의 지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항으로 인해 한사군의 통치는 순탄하지 않았고, 한나라 입장에서도 그 넓은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결국 한사군은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기원전 82년(한 소제 시원 5년), 임둔군과 진번군은 폐지되어 낙랑군과 현도군에 흡수되었습니다. 또한 현도군은 토착 이민족들의 압력으로 인해 그 위치를 옮기기도 했습니다. 이는 한나라의 직접적인 통치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사군의 실질적인 지배 범위는 점차 축소되었고, 특히 낙랑군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토착 세력의 자치권이 점차 강해지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고구려의 성장과 한사군의 소멸

한사군이 설치된 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그 북방 지역에서는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 같은 새로운 국가들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이들은 한사군의 존재를 자신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인식했고, 꾸준히 한사군에 대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고구려의 강력한 성장은 한사군에게는 큰 위협이었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4세기 초, 미천왕(美川王) 시기에 이르러 낙랑군을 공격하여 축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던 한사군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던 낙랑군마저 한반도에서 소멸하게 됩니다. 낙랑군의 소멸은 한반도에서 중국 세력이 완전히 물러나고,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이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되새기며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강력한 고대 국가가 외부 세력에 의해 무너지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고조선의 멸망은 우리 민족이 외부 침략에 맞서 어떻게 저항하고, 또 어떻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한사군은 비록 한나라의 지배 기구였지만, 그 존재는 한반도에 선진적인 철기 문화와 중국의 문물을 전파하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민족은 한사군의 지배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하며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한 것은 이러한 자주 정신의 발현이자,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조선의 마지막과 한사군의 이야기는 비극과 희망, 그리고 저항의 역사가 교차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우리에게 깊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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