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막이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 역사는 종종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냅니다. 왕의 죽음이라는 가장 엄숙하고 슬퍼야 할 국가적 장례 절차에서, 조선은 역사상 가장 치열한 이념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 단순히 상복(상례에 입는 옷)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시작된 이 다툼은, 왕위의 정통성(正統性, 정당하고 올바른 계통)과 왕과 신하의 관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거대한 정치 투쟁으로 번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종 시대 조선의 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예송 논쟁’입니다. 아버지 효종의 죽음 앞에서 아들 현종은 왜 그토록 괴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을까요? 상복 속에 숨겨진 치열한 권력 다툼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송 논쟁의 불씨, 효종의 죽음
1659년, 북벌(北伐)의 꿈을 품고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제17대 왕 효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위를 이은 아들 현종은 슬픔 속에서 국가의 장례 절차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바로 효종의 계모(새어머니)이자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문제가 복잡해진 이유는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차남)이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 왕위에 오른 효종의 지위는, 성리학적 예법(禮法)의 관점에서 논쟁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 세력과 이에 대항하던 남인 세력은 이 문제를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1차 예송(기해예송), 서인의 승리
효종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주자가례’와 ‘경국대전’을 근거로 내세웠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습니다. “효종대왕께서는 왕위를 계승하셨으나, 종법상으로는 둘째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국법에 따라 사대부(士大夫, 학식과 지위가 높은 관리 계층)의 예법을 적용하여 자의대비께서는 1년 상복(기년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이는 왕이라 할지라도 성리학적 예법의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서인들의 속내는 왕권(王權,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신권(臣權, 신하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왕의 권위보다는 사대부들이 지켜온 예법의 원리가 더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려 한 것입니다.
반면, 남인의 윤휴와 허목 등은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왕가의 예법은 일반 사대부의 예법과 같을 수 없습니다. 효종대왕께서는 비록 둘째 아들이셨으나 왕위를 계승하시어 종묘사직을 이으셨으니, 마땅히 맏아들의 예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따라서 자의대비께서는 3년 상복(삼년복)을 입으시는 것이 도리입니다.” 남인들은 왕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왕권 강화를 통해 서인 중심의 정국을 뒤집고자 했습니다. 갓 즉위하여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현종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쥔 서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자의대비는 1년 상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1차 예송은 서인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되풀이된 논쟁, 2차 예송(갑인예송)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1674년, 이번에는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다시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맏며느리가 아닌 둘째 며느리의 상을 당했을 때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2차 예송, 즉 ‘갑인예송’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서인들은 이번에도 일관된 논리를 펼쳤습니다. “효종께서 둘째 아들이셨으니, 그의 아내인 인선왕후 역시 둘째 며느리입니다. 따라서 예법에 따라 9개월 상복(대공복)을 입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확고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남인들의 반격이 매우 날카롭고 논리적이었습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스스로 만든 논리의 함정을 파고들었습니다. “지난 1차 예송 당시 서인들은 효종을 둘째 아들이라 칭하면서도, 실제로는 맏아들에게만 적용되는 1년 상복을 입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효종을 사실상 맏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맏아들의 아내인 인선왕후의 상에 대해서도 맏며느리의 예법을 적용하여 1년 상복(기년복)을 입으셔야 마땅합니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과거 주장을 역이용하여 그들의 논리적 모순을 정확히 찔렀습니다.
남인의 역전승, 그리고 새로운 국면
15년 전, 아버지의 상을 당해 슬픔과 혼란 속에서 서인의 손을 들어주었던 현종은 이제 더 이상 신참내기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왕권을 억누르려 했던 서인들에게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남인들의 논리는 왕실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것이었기에 현종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침내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의대비가 1년 상복을 입도록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상복 문제의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2차 예송에서의 승리는 남인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안겨주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핵심 인물들은 대거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권을 강화하려던 현종의 의지와 남인의 정치적 목표가 맞아떨어진 극적인 역전승이었습니다.
상복이 뭐길래? 예송 논쟁의 본질
고등학생 여러분은 아마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고작 상복 입는 기간 때문에 저렇게까지 싸울 일인가?’ 하지만 예송 논쟁의 본질은 상복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왕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정치적 대립이 있었습니다. 서인은 왕 또한 성리학적 질서와 예법 아래에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왕이라도 사대부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왕권을 신하들의 견제 아래 두려는 ‘신권 정치’의 이념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 남인은 왕은 국가의 근본이자 종묘사직을 잇는 특별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왕권 강화’의 이념을 대변했습니다. 결국 예송 논쟁은 상복을 매개로 왕권과 신권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논쟁이 남긴 교훈
1, 2차에 걸친 예송 논쟁은 현종 대에 남인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조선의 붕당(朋黨,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모인 집단) 정치가 건강한 토론과 견제의 단계를 넘어, 상대 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송 논쟁의 승패는 이후 숙종 시대에 벌어지는 여러 차례의 환국(정권이 급격하게 교체되는 정치적 변동)으로 이어지며 피비린내 나는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낳았습니다. 단순한 예법 논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는 조선 후기 정치사를 뒤흔든 거대한 태풍이었습니다. 예송 논쟁은 우리에게 원칙과 명분이 정치적 이념과 권력 의지와 만났을 때 얼마나 폭발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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