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과, 죽음보다 깊은 침묵으로 저항했던 생육신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기나긴 슬픔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 왕의 눈물을 닦아준 영조 임금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1457년, 영월의 차가운 객사에서 열일곱의 나이로 숨을 거둔 단종. 그 후 조선의 역사에서 단종이라는 이름은 금기어였습니다. 누구도 감히 억울하게 죽은 왕을 입에 올리지 못했고, 그의 무덤은 버려진 채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산이 스무 번도 더 바뀐 237년(혹은 2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그 금기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숙종 대에 시작되어 영조 대에 이르러 활짝 꽃피운 단종 복권의 역사. 과연 영조는 어떤 마음으로 단종의 한을 풀어주었을까요? 오늘은 조선 후기 정치와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조와 단종의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을 소개합니다.
금기시되었던 이름, 200년 넘게 이어진 침묵의 역사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조선 사회에서 단종을 추모하는 것은 곧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세조가 조선의 왕이 된 이상, 단종은 왕위를 뺏긴 피해자가 아니라 무능하여 쫓겨난 '노산군'이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 같은 충신은 후환이 두려워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했고, 영월의 백성들은 단종의 기일이 되면 몰래 숨어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중앙 정치 무대인 한양에서 단종의 복권을 거론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침묵은 성종과 중종을 거쳐 조선 중기까지 20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으며 조선 사회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림 세력이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힘으로 뺏은 권력은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흐름은 숙종 대에 이르러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숙종이 열고 영조가 완성한 복권의 대서사시
단종 복권의 첫 단추를 끼운 것은 숙종이었습니다. 숙종 24년(1698년), 마침내 노산군은 '단종(端宗)'이라는 묘호를 받고 왕으로 복위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은 왕릉의 격식을 갖춘 '장릉'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무려 241년 만에 왕의 자리를 되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문서상의 복권과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힌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 미완의 과제를 온전히 해결하고, 단종을 조선 왕실의 당당한 조상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한 인물이 바로 영조였습니다.
영조는 즉위 기간 내내 '탕평책'을 펼치며 당파 싸움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영조가 가장 강조했던 가치는 바로 '충(忠)'이었습니다.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이었습니다. 영조는 생각했습니다.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사육신이야말로 만고의 충신이다. 그들의 충성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지금 나의 신하들에게 필요한 정신이다." 영조는 단종 복권 사업을 자신의 통치 철학을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영조의 눈물, 300년의 시공간을 넘은 공감
영조가 단종에게 가졌던 마음은 단순한 정치적 계산을 넘어선, 인간적인 연민과 동질감이었습니다. 영조 역시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천한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콤플렉스, 그리고 이복형인 경종의 죽음과 관련되었다는 의심 속에서 늘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특히 영조는 1733년, 아직 왕세제(왕의 동생으로서 왕위 계승자가 된 사람)이던 시절에 영월의 장릉을 직접 참배했습니다. 조선의 왕이나 세자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영월까지 가서 참배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덤 앞에 선 영조는 단종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저 차가운 땅 아래 누워 있는 어린 왕의 슬픔을 누가 알겠는가." 영조의 눈물은 보여주기식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던 숙부(세조)에 의해 희생된 단종의 처지에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명을 위협받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영조는 즉위 후에도 수시로 단종을 기리는 글을 짓고, 단종의 기일이 되면 슬픈 표정으로 신하들과 함께 그를 추모했습니다.
단종 승하 300주년, 영월에 울려 퍼진 위로
영조 33년(1757년)은 단종이 승하한 지 딱 3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영조는 이해를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국왕의 권위로 단종을 위한 성대한 추모 행사를 열었습니다.
영조는 친히 글을 지어 단종의 영혼을 위로했고, 전국의 유생들에게 단종과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과거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또한 영월에 있는 장릉의 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장릉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각이나 비석 등 많은 시설물이 이때 영조의 명으로 다듬어진 것들입니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00년 전의 일이라고 해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가 이토록 슬퍼하는 것은 단지 옛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정의와 의리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영조에게 단종 복권은 단순히 죽은 왕의 명예 회복을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가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식이었습니다.
충신들을 위한 배려, 사육신과 생육신의 완전한 명예 회복
영조의 단종 사랑은 단종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과, 평생을 숨어 살았던 생육신의 충절을 높이는 데에도 앞장섰습니다.
숙종 때 이미 사육신의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영조는 그들의 후손을 찾아 벼슬을 내리고, 그들이 살았던 집터에 표석을 세워주었습니다. 특히 영조는 '이원익'이나 '황희' 같은 명재상들 못지않게, 성삼문이나 박팽년 같은 절의지사(절개와 의리를 지킨 선비)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심지어 세조의 편에 섰던 신숙주의 후손들이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영조는 거침없이 사육신을 찬양했습니다. "비록 내 선조(세조)에게는 반역자였을지 모르나, 그들의 충심만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이것은 왕으로서 자신의 조상인 세조의 과오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셈이었지만, 영조는 '충'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이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영조의 결단 덕분에 사육신은 오늘날까지 만고의 충신으로 기억될 수 있었습니다.
죽어서야 다시 만난 부부, 정순왕후와의 영혼 결혼
단종의 한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바로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여덟 살에 남편과 생이별하고,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넘게 홀로 지내야 했던 비운의 왕비. 그녀는 죽어서도 남편 곁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영조는 이 안타까운 사연을 가엾게 여겼습니다. 비록 무덤을 영월로 옮겨 합장하지는 못했지만(거리가 너무 멀고 비용 문제 등으로), 영조는 정순왕후의 묘인 '사릉'을 왕릉의 격식에 맞게 정비하고, 단종의 위패가 모셔진 영녕전에 정순왕후의 위패를 함께 모시도록 했습니다.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던 부부가 죽어서나마 영조의 배려로 한 방에서 밥을 먹고(제사상),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영조는 정순왕후가 생전에 자주 올라가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울었다는 바위(동망봉) 근처에 비석을 세워 그 절개를 기리기도 했습니다.
영조가 단종 복권을 통해 꿈꾸었던 세상
그렇다면 영조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20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에 매달렸을까요? 그것은 단종 복권이 영조가 꿈꾸던 '탕평의 세상'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조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극심했습니다. 신하들은 서로 헐뜯고, 왕의 정통성마저 공격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 대신, "누가 더 나라와 왕에게 충성스러운가"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내세우고 싶었습니다.
단종과 사육신은 당파를 초월한 충성의 상징이었습니다. 노론이든 소론이든, 남인이든 북인이든 단종의 비극 앞에서는 모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조는 단종이라는 역사적 아이콘을 통해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왕을 중심으로 뭉치는 강력한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단종 복권은 과거의 치유이자 미래를 위한 통합의 메시지였습니다.
맺음말을 대신하여, 역사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단종이 영월로 쫓겨나 죽음을 맞이한 지 237년(복권 논의가 본격화된 시점 기준)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된 복권의 드라마. 그 끝에는 영조라는 걸출한 왕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영조가 흘린 눈물과 그가 세운 비석들 덕분에, 단종은 더 이상 패배한 왕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존경받는 군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죽은 화석이 되기도 하고, 살아있는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영조는 300년 전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여 끌어안음으로써 조선의 역사를 한 단계 성숙시켰습니다.
오늘날 영월의 장릉에는 해마다 수많은 추모객이 찾아옵니다. 그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소년 왕에 대한 연민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억울함을 풀어주려 노력했던 후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곳에 서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조가 이룬 단종의 복권, 그것은 '한(恨)'을 '정(情)'으로 승화시킨 우리 역사의 가장 아름다운 치유의 과정이었습니다.
(용어 설명)
탕평책(蕩平策): 조선 영조와 정조 시대에, 어느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당쟁을 없애려 했던 정치 정책입니다.
묘호(廟號): 왕이 죽은 뒤에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붙이는 이름입니다. '태조', '세종', '단종' 같이 뒤에 '조(祖)'나 '종(宗)'을 붙여 부릅니다.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이름과 관직 등을 적은 나무패로, 제사를 지낼 때 그 사람의 영혼을 대신하는 상징물입니다.
왕세제(王世弟): 왕의 아들이 없어 왕위 계승자가 된 왕의 남동생을 부르는 말입니다. 영조는 형인 경종의 뒤를 잇기 위해 왕세제가 되었습니다.
사릉(思陵):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의 무덤입니다.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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