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조선 순조 삼정의 문란에 피눈물 흘린 조선의 농민들

19세기 조선, 한양의 권세가들은 화려한 연회를 즐기고 있었지만, 그들의 부와 사치는 백성들의 쥐어짜 낸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정조라는 위대한 개혁 군주가 세상을 떠난 후, 안동 김씨를 비롯한 외척 세력이 권력을 독점한 세도 정치(勢道 政治)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시기 나라의 근간을 이루던 조세 제도는 완전히 붕괴하여, 백성을 살리는 도구가 아닌,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 흡혈귀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농민들을 끝없는 절망으로 내몰았던 삼정의 문란(三政의 紊亂)입니다.

1. 삼정(三政)이란 무엇인가?

삼정은 조선의 국가 재정을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세금 제도를 말합니다.

  • 전정(田政):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즉 토지세입니다.

  • 군정(軍政):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에게 군역(軍役) 대신 옷감을 거두던 군포입니다.

  • 환곡(還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낮은 이자로 갚게 하던 구휼 제도입니다.

본래 삼정은 나라를 운영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 아래에서 이 제도는 탐관오리들의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철저히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2. 죽은 자와 갓난아이에게 군포를! 군정(軍政)의 문란

삼정 중에서도 백성들을 가장 먼저 괴롭힌 것은 군정이었습니다. 군역의 의무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군포를 거두어들였습니다.

  • 백골징포(白骨徵布): 이미 세상을 떠나 백골이 된 사람의 몫까지 군포를 징수했습니다.

  • 황구첨정(黃口簽丁): 아직 젖도 떼지 않은 갓난아이(입이 노랗다고 하여 황구)를 군역 대상자로 등록하고 군포를 거두었습니다.

  • 족징(族徵)과 인징(隣徵):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해 농민이 도망가면, 그 군포를 친척(족징)이나 이웃(인징)에게 강제로 떠넘겼습니다.

이 때문에 멀쩡하던 마을 공동체는 서로를 원망하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지옥으로 변했고, 수많은 농민이 살던 곳을 등지고 유랑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3. 땅도 없는데 세금을? 전정(田政)의 문란

토지세인 전정의 문란도 극심했습니다. 관리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규정된 세금보다 훨씬 많은 양을 거두어 사익을 채웠습니다. 이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무지나 이미 사라진 토지를 토지대장에 그대로 올려놓고 세금을 부과하는 ‘진결(陳結)’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세금을 운반하고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 등 각종 부가세를 멋대로 붙여 원래 세금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을 뜯어냈습니다. 농민들은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세금을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것 하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4. 백성을 구제하는 제도가 빚더미를 만들다, 환곡(還穀)의 문란

삼정의 문란 중에서도 가장 그 폐해가 심각하여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환곡이었습니다. 본래 백성을 돕기 위한 제도가 어떻게 백성을 해치는 최악의 악법이 되었을까요?

관리들은 환곡을 고리대금업처럼 운영했습니다. 곡식이 필요 없는 농민에게도 강제로 빌려준 뒤, 가을에 엄청난 이자를 붙여 갚게 했습니다. 더욱 악랄한 것은, 빌려줄 때는 쌀에 모래나 겨를 섞어 양을 부풀려서 주고, 갚을 때는 가장 품질 좋은 쌀로만 받았습니다.

이 끔찍한 현실에 대해 대학자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같이 통탄하며 기록했습니다.

“환자(환곡)는 본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좋은 법이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백성을 해치는 나쁜 법이 되었다. (중략) 아전들은 온갖 방법으로 농간을 부려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빌려주고, 갚을 때는 가장 좋은 쌀을 받아낸다. 백성들이 빚을 갚지 못하면 소를 끌어가고 집을 빼앗으니, 그 원망과 고통이 하늘에 닿는다.”

정약용의 말처럼, 환곡은 백성을 빚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악마의 제도가 되었습니다. 빚은 빚을 낳았고, 결국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과 집마저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5. 희망 없는 삶, 저항의 불씨가 되다

전정, 군정, 환곡의 삼중고 속에서 조선의 농민들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없었습니다. 나라의 법과 제도가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고 오히려 착취의 도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마침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손에 낫과 죽창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1862년 임술농민봉기(진주 민란) 등 전국 각지에서 타오른 민란의 불길은, 삼정의 문란이 얼마나 백성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는지를 보여주는 피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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