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 대원군, 민생 안정을 위해 개혁을 실시하다

19세기 중반 조선의 백성들은 희망 없는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세도 정치(勢道 政治) 아래에서, 국가의 세금 제도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탐관오리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삼정의 문란(三政의 紊亂)은 농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고, 전국 각지에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한 백성들의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무너진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의 칼을 빼 들었습니다.

양반도 군포를 내라! 불평등을 깨부순 '호포법'

당시 백성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군정(軍政)의 문란이었습니다. 죽은 사람(백골징포)과 갓난아이(황구첨정)에게까지 군포를 물리는 상황에서, 정작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兩班)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군포를 한 푼도 내지 않았습니다. 모든 부담이 가난한 농민에게만 떠넘겨지는 불공정한 구조였죠.

대원군은 이 불평등한 제도를 과감히 혁파했습니다. 바로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한 것입니다. 호포법은 신분과 관계없이 집집마다(戶) 군포를 내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는 조선 건국 이래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양반들의 특권을 없애버린, 그야말로 혁명적인 조치였습니다. 양반들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대원군은 이를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마침내 조세의 공평성을 실현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습니다.

고리대금업의 소굴, 서원을 철폐하다

전국의 서원(書院)은 본래 학문을 연구하는 신성한 공간이었지만, 세도 정치 시기에는 지방의 암적 존재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들은 면세 혜택을 누리며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을 일삼으며 재산을 불렸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서원에 한번 빚을 지면 집과 땅을 모두 빼앗기기 일쑤였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서원이 백성을 착취하고 국가 재정을 축내는 '나라의 좀벌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전국의 600여 개 서원 중, 꼭 필요한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철폐해 버렸습니다. 이로써 국가의 재정은 늘어났고, 지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서원이 사라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한결 나아질 수 있었습니다.

빚의 굴레를 끊어내다, '사창제'의 실시

원래 가난한 백성을 돕기 위한 제도였던 환곡(還穀)은 탐관오리들의 손에서 강제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봄에 억지로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몇 배의 이자를 붙여 갚게 하니, 백성들은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죠.

대원군은 이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환곡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했습니다. 사창제는 관리가 아닌, 그 지역에서 덕망 있는 사람이 마을 공동의 창고(社倉)를 관리하며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곡식을 빌리고 갚도록 한 제도입니다. 이를 통해 관리들의 부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환곡 제도를 본래의 목적인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 외에도 대원군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권세가들이 몰래 숨겨놓은 토지(은결, 隱結)를 찾아내 세금을 부과하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는 등, 오직 백성의 입장에서 불합리한 제도를 뜯어고치는 데 집중했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민생 안정 개혁은 왕권 강화라는 큰 목표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어야만 왕조의 기틀이 바로 서고, 나라도 튼튼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그의 통치가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절망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구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그의 노력은 조선의 마지막을 지탱하려 했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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