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의 대한민국 지도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국경선이 처음부터 우리의 것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만 해도, 이 광활한 북방 영토는 우리 백성이 함부로 발 디딜 수 없는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을 꽃피운 '성군' 세종대왕. 하지만 세종은 책상에만 앉아있던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였고, 백성의 삶을 지키기 위한 '영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북쪽 경계가 어떻게 피와 땀으로 그려지게 되었는지, 바로 세종의 위대한 북방 개척 사업, '4군 6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훈민정음보다 시급했던 북방의 안정
조선 초, 북방 지역은 나라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는 여진족, 즉 **야인(野人: '들사람'이라는 뜻으로, 당시 조선이 북방의 여진족을 부르던 말)**들이 터전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강력한 기마병을 중심으로 수시로 국경을 넘어와 조선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해했습니다. 조선의 실질적인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남쪽인 청천강 유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이 **변방(邊方: 나라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지역)**의 위협에 떨고 있는데, 나라의 문화나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종에게 북방 영토의 개척은 백성을 지키기 위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군사 행동과 치밀한 이주 계획을 동시에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쪽을 지켜라, 노장 최윤덕의 '4군' 설치
세종의 북방 **경략(經略: 땅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정책이나 계획)**은 서쪽, 즉 압록강 유역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이 임무는 태종 때부터 전장을 누빈 백전노장, 최윤덕 장군에게 맡겨졌습니다. 최윤덕은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웅크리고 있던 여진족의 거점을 소탕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1433년, 최윤덕은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여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개의 군사 기지를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연, 자성, 무창, 우예로 이어지는 '4군'입니다. 이 4군의 설치로 조선은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삼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산세가 너무 험하고 여진족의 저항이 거세어, 훗날 유지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호랑이" 김종서, 두만강 유역을 개척하다
서쪽 압록강 유역이 정리되자, 세종의 시선은 동쪽, 즉 두만강 유역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4군 지역보다 훨씬 더 넓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세종은 이 막중한 임무를 의외의 인물에게 맡깁니다. 그는 무장이 아닌, 집현전에서 학문을 닦던 문신, 바로 김종서였습니다. 세종은 김종서의 꼼꼼함과 전략가적 기질을 높이 샀습니다. 1434년, 김종서는 함길도(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십수 년간 북방의 최전선에 머무릅니다. 그는 단순히 싸움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직접 말을 타고 지형을 살피고, 여진족의 동태를 분석하며 가장 효율적인 방어선을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으로 여진족을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6개의 군사 기지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흥, 경원, 회령, 종성, 온성, 부령으로 이어지는 '6진'입니다. 김종서는 6진을 설치한 후에도 그곳에 머물며 북방 방어 체계를 완성시켰고, 이로 인해 "큰 호랑이(大虎)"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땅을 얻는 것보다 어려웠던 과제, 사민정책
4군과 6진이라는 군사 기지를 세웠다고 해서 그 땅이 곧바로 조선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은 비어있고 땅은 황무지였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은 언제든 다시 적에게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세종의 진짜 위대한 전략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바로 '사민정책(徙民政策: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켜 새로운 지역에 살게 하던 정책)'입니다. 세종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쪽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북방의 4군 6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따뜻하고 비옥한 고향 땅을 버리고, 춥고 척박한 북쪽으로 가야 했던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도망치는 사람도 속출했고, 낯선 땅에서 병들어 죽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이주민들에게 토지와 세금 감면 혜택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력한 법으로 이탈을 막았습니다.
피와 눈물로 이룬 백성들의 토착화
사민정책은 4군 6진 개척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었습니다. 강제로 이주해 온 남쪽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살던 여진족 중 조선에 귀순한 이들(향화인)도 함께 섞여 살게 했습니다. 또한 죄를 지은 범죄자들도 이곳으로 보내 땅을 개간하게 했습니다. 초기에는 수많은 갈등과 반발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은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척박한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무기를 들고 여진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의 피와 눈물이 수십 년간 쌓인 뒤에야, 비로소 북방의 황무지는 조선 백성들이 뿌리내리고 사는 '우리 땅'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토착화(土着化):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주민이 되는 것) 노력이 없었다면 4군 6진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무너졌을 것입니다.
사라진 4군, 그러나 굳건해진 6진
4군 6진이 모두 성공적으로 유지된 것은 아닙니다. 최윤덕이 개척한 '4군' 지역은 산세가 너무 험준하고 적의 침입이 잦아 방어와 보급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결국 세종 사후, 단종 대에 이르러 4군 중 대부분의 기지는 압록강 이남의 내륙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4군 개척은 절반의 성공으로 그친 셈입니다. 하지만 김종서가 개척한 '6진' 지역은 달랐습니다. 이곳은 비교적 넓은 평야가 있어 농사를 짓고 백성들이 정착하기에 유리했습니다. 6진은 사민정책이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면서, 함경도의 핵심 지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6진의 성공적인 정착 덕분에, 조선은 두만강을 확고한 북쪽 경계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딛고 선 땅의 경계를 그리다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은 조선의 지도를 완성한 위대한 사업이었습니다. 비록 4군은 후퇴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6진의 성공과 압록강,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세종의 강력한 의지는 조선의 북방 경계를 확정 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정신을 일깨운 일이라면, 4군 6진 개척은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지켜낸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한반도 지도라고 부르는 이 땅의 모습은, 성군 세종의 냉철한 현실 인식과, 최윤덕, 김종서 같은 명장들의 헌신,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백성이 고향을 등지고 흘려야 했던 피와 눈물 위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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