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자 원칙을 깨다, 태종은 왜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세종을 택했나

 


'피의 군주', '철혈 군주'. 태종 이방원을 수식하는 말들은 유난히 차갑고 무겁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의 피를 보았고,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외척과 공신들을 가차 없이 숙청했습니다. 그런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룩한 강력한 왕권, 그 보위(寶位: 임금의 자리, 즉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정하는 일은 조선의 미래가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국시(國是)인 유교에서 왕위 계승의 제1원칙은 '적장자 계승'입니다. 정실부인의 맏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하늘의 이치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그 원칙을 스스로 깨뜨립니다. 그는 왜 맏아들 양녕대군을 폐위(廢位: 왕이나 왕세자 등의 자리에서 쫓아냄)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훗날 세종)을 선택했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변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을 만들기 위한 태종의 가장 위대한 '설계'였을까요?

흠잡을 데 없는 적장자, 양녕대군

사실 양녕대군은 처음부터 문제아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태종 이방원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왕이 되기 전부터 함께 고난을 겪은 적장자(嫡長子: 정실부인에게서 낳은 맏아들)였습니다. 양녕은 총명했고, 아버지 태종을 닮아 무예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호방했습니다. 태종은 1404년, 일찌감치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지극한 기대를 걸었습니다. 태종 스스로가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겪었기에, 다음 시대만큼은 적장자 계승을 통해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태종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스승으로 붙여 양녕대군을 완벽한 후계자로 교육시키려 했습니다.

엇나가는 세자, 태종의 기대를 저버리다

하지만 양녕대군의 자유로운 기질은 엄격한 궁궐의 법도와 유교적 가르침에 갇히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는 학문보다는 사냥과 놀이를 즐겼고, 특히 여성 문제로 아버지 태종의 속을 검게 태웠습니다. 결정적으로 '어리'라는 여인에게 빠져 궁궐 밖으로 나도는가 하면, 세자빈을 멀리하고 궁궐에 몰래 여인을 들이는 등 세자로서의 품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들을 반복했습니다. 태종은 아들을 훈계하고, 그의 스승들을 질책하며 어떻게든 양녕대군을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양녕의 기행은 그치지 않았고, 아버지 태종과 아들 양녕 사이의 갈등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졌습니다.

태종의 눈에 들어온 셋째 아들, 충녕대군

태종의 시선이 실망스러운 맏아들을 벗어나 향한 곳, 그곳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있었습니다. 양녕대군이 궁궐 밖을 떠돌며 책을 멀리할 때, 충녕대군은 궁궐 가장 깊은 곳에서 책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학문 자체를 즐겼습니다. 건강이 상할까 염려한 태종이 책을 숨겼을 정도였습니다. 충녕은 단순히 책만 읽는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의 정치적 결단을 곁에서 지켜보며 깊은 통찰력을 키웠고, 백성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꿈꾸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왕은, 호방한 양녕이 아니라 학문에 깊고 성품이 바른 충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양녕의 광기인가, 태종의 설계인가

양녕대군의 폐위 과정을 두고 역사가들은 두 가지 시선을 보냅니다. 첫째는, 양녕대군이 스스로 '미친 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찍이 동생 충녕대군의 비범함을 알아보았고, 왕의 자리가 자신보다 충녕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적장자라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충녕이 왕이 될 수 없음을 알자, 일부러 망나니처럼 행동하여 아버지 태종이 자신을 포기하고 충녕을 선택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양녕은 폐위된 이후에도 동생 세종의 왕권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습니다. 둘째는, 이 모든 것이 태종의 '설계'였다는 시각입니다. 태종이 이미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점찍었고, 양녕대군의 사소한 잘못을 빌미 삼아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태종의 압박에 못 이긴 양녕이 아예 엇나가 버렸다는 해석입니다.

1418년, 조선의 운명을 바꾼 결단

1418년, 태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 양녕대군의 폐위를 공표했습니다. "세자는 천성이 어둡고 미쳤으며, 행동이 광패하여 종묘사직을 맡길 수 없다." 이것이 공식적인 폐위의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태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충녕대군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불과 두 달 뒤, 태종은 왕세자가 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28세의 젊은 왕, 세종을 즉위시켰습니다.

상왕 태종, 세종의 하늘이 되어 칼을 잡다

하지만 태종의 '설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上王: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왕)이 되었지만, 태종은 군사권만큼은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 세종에게는 학문과 정치를 맡기고,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더러운 일'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세종의 장인, 즉 왕의 외척(外戚: 왕비의 친척)인 심온을 숙청한 일입니다. 세종이 즉위하자마자 심온의 세력이 커질 것을 염려한 태종은, 심온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그와 가문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아들 세종은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 태종의 결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태종은 세종이 어진 정치를 펼치는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며 아들의 하늘을 가리는 모든 먹구름을 칼로 베어버린 것입니다.

위대한 성군을 위한 가장 냉혹한 포석

태종 이방원이 맏아들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아들 세종을 왕위에 올린 사건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가장 파격적인 왕위 계승이었습니다. 만약 태종이 원칙에 얽매여 양녕대군을 끝까지 왕으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성군 세종대왕'의 시대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태종은 아들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혔고, 조선 최고의 왕을 만들기 위해 맏아들을 버리는 비정함까지 감수했습니다. 태종의 가장 냉혹했던 '마지막 설계'는 그렇게 조선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여는 위대한 포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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