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빛이 되리라" 훈민정음 창제, 세종과 집현전의 불꽃 튀는 대립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어 눈물 흘리는 백성, 글을 몰라 나라의 법을 어기고 벌을 받는 농민, 좋은 농사법이 담긴 책을 그림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조선의 4대 왕 세종의 눈에는 이 모든 절박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그 유교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양반뿐이었습니다. 나라의 근간인 백성이 완벽한 '까막눈'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세종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심했습니다. 백성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우리만의 글자를 만들기로. 그러나 이 위대한 결심은, 역설적이게도 세종이 가장 아끼고 신임했던 학문 기관, '집현전'의 가장 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왕의 가장 든든한 두뇌 집단이었던 그들은 왜 백성을 위한 글자, 훈민정음 창제에 그토록 격렬하게 저항했을까요?

"내 어찌 백성을 외면하랴" 세종의 깊은 애민정신

세종대왕은 조선의 그 어떤 왕보다 백성을 깊이 사랑한 군주였습니다. 그의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정신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은 한자로 된 어려운 법률 조문 하나를 잘못 해석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백성들의 사연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직접 편찬을 명한 농사직설과 같은 농업 기술서나 의학 서적들이, 정작 그것이 가장 필요한 백성들에게는 전달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문맹(文盲)은 단순히 글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차별이자 고통이었습니다. 세종에게 새로운 글자의 창제는 선택이 아닌, 백성을 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는 "임금이 할 일은 백성이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훈민정음 창제라는 거대한 사업으로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왕의 비밀 프로젝트, 마침내 드러난 새 글자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극비리에 추진했습니다. 만약 이 계획이 사전에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그 반대에 부딪혀 시작조차 못 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 없이, 주로 왕자(문종, 수양대군)와 공주(정의공주) 등 왕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연구에 매달렸습니다. 발음 기관을 본뜨고 하늘과 땅, 사람의 이치를 담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28개의 글자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1443년 겨울, 세종은 마침내 이 새로운 글자의 완성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내가 백성을 위해 새 글자를 만들었노라." 이 선포는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집현전의 격렬한 반대 상소

왕의 발표에 가장 큰 충격을 받고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세력은 다름 아닌 집현전 학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종의 학문적 파트너이자 정치적 동지였습니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 문제에서만큼은 그들은 왕과 정반대의 입장에 섰습니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필두로 한 학자들은 훈민정음 반포를 결사반대하는 **상소(上疏: 신하가 왕에게 글로 의견이나 비판을 올리는 것)**를 올렸습니다. 그들의 반대 논리는 확고했습니다. 그들은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며, 이는 곧 조선이 스스로를 문명국이 아닌 야만국으로 격하하는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진짜 이유

최만리와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사대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섬기는 나라인 명나라와 다른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도리가 아니며, 외교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의 사대(事大: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으로, 당시 조선이 명나라를 대하던 외교의 기본 원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 기저에는 더 깊고 완고한 이유가 숨어있었습니다. 바로 '엘리트주의'였습니다. 수십 년을 공부해야 겨우 익힐 수 있는 '한자'는 양반 사대부 계급이 백성을 다스리고 지식을 독점하는 핵심 수단이었습니다. 만약 며칠 만에 배울 수 있는 쉬운 글자가 퍼진다면,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무너지고 사회 질서가 **궤멸(潰滅: 무너지고 흩어져 망함)**될 것이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에게 훈민정음은 지식의 평등화를 가져올 위험한 불씨였던 것입니다.

세종의 분노와 꺾이지 않은 신념

자신이 가장 믿었던 학자들의 반대 상소를 받은 세종은 격노했습니다. 특히 "이두(吏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식)"와 같은 불편한 표기법은 수백 년간 잘만 써왔으면서, 백성을 위해 만든 완벽한 글자를 '오랑캐의 것'이라 폄하하는 그들의 이중성과 오만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세종은 최만리 등을 직접 불러들여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너희가 말하는 사대란 것이 이런 것이냐? 백성이 편해지는 일을 하는 것이 어찌 오랑캐의 일이란 말이냐!" 세종은 최만리 등 주동자들을 잠시 옥에 가두기까지 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그 어떤 반대에도 꺾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침내 세상에 퍼진 백성의 글자

집현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세종은 반대 세력을 설득하고 찍어누르는 동시에,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1445년, 훈민정음으로 쓰인 최초의 작품인 '용비어천가'를 지어 조상들의 위업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이는 새 글자가 국가의 공식적인 문자로 손색없음을 증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446년 9월, 글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히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반포(頒布: 널리 펴서 세상에 알리는 것)**했습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이 선언은, 조선이 마침내 백성을 위한 진정한 소통의 도구를 갖게 되었음을 알리는 위대한 포고였습니다.

문자의 장벽을 허문 가장 위대한 혁명

훈민정음의 창제는 단순한 문자 발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식을 독점했던 소수 지배층의 성벽을 허물고, 모든 백성에게 '배움'이라는 빛을 나누어 주려 한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신을 지지해야 할 집현전 학자들의 가장 강력한 반대라는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오직 백성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이름 그대로, 이 스물여덟 글자는 억울한 자에게는 목소리가 되고, 배우고 싶은 자에게는 지혜의 창이 되어 주었습니다. 세종이 심은 이 위대한 씨앗은 수백 년의 세월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소통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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