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지 속 그림 한 장이 유럽 미술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1850년대 프랑스 파리의 한 인쇄 공방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이 일본에서 건너온 도자기 상자를 열었는데 깨지지 않도록 채워 넣은 종이 뭉치 속에서 낯선 그림책 한 권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호쿠사이 만화였습니다. 이 일화가 사실 그대로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흔하고 값싼 그림이었던 우키요에가 유럽에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새로운 예술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 서민들이 즐겨 사고팔던 목판화입니다. 가격은 흔히 국수 한 그릇 값 정도였다고 말할 만큼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박한 그림이 바다를 건너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실 벽에 걸렸고 반 고흐와 모네 같은 거장들의 붓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키요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리고 목판화 한 장이 어떻게 유럽 화가들을 사로잡아 자포니슴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는지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덧없는 세상을 그린 그림 우키요에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우키요에라는 이름은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우키요라는 말은 불교에서 괴롭고 덧없는 세상을 뜻했지만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어차피 덧없는 인생이라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자는 밝은 느낌의 말이 된 것입니다.
에도가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자 돈을 벌고 여가를 즐기는 서민층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가부키 공연을 보러 다니고 유명한 배우와 미인에 열광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브로마이드나 연예 잡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우키요에였습니다. 인기 배우의 얼굴과 유행하는 옷차림과 명소 풍경이 판화로 찍혀 거리의 가게에서 팔려 나갔습니다.
초기의 우키요에는 먹으로 선만 찍고 색은 손으로 칠하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가 한 장짜리 판화 형식을 널리 알리면서 우키요에는 독립된 장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1765년 무렵 스즈키 하루노부가 여러 가지 색을 겹쳐 찍는 다색 판화를 완성하면서 우키요에는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비단처럼 화려하다는 뜻에서 니시키에라고 불린 이 판화 덕분에 서민들도 선명한 색채의 그림을 손쉽게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가와 조각가와 인쇄공이 함께 만든 한 장의 기적
우키요에 한 장은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작가라고 부르는 호쿠사이나 히로시게는 사실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밑그림을 나무판에 붙여 선을 정교하게 깎아내는 조각 장인이 있었고 판에 물감을 바르고 종이를 올려 한 장씩 찍어내는 인쇄 장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비용을 대고 판매까지 책임진 사람은 출판업자였습니다. 출판업자는 요즘으로 치면 제작사 대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떤 주제가 잘 팔릴지 판단하고 인기 화가를 섭외해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우키요에가 철저히 시장의 취향을 따라 만들어진 대중문화 상품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색을 여러 번 겹쳐 찍으려면 색깔마다 판을 따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판이 조금만 어긋나도 그림이 번져 버리기 때문에 종이를 정확한 위치에 올리는 기술이 무척 중요했습니다. 장인들은 판 모서리에 작은 홈을 파서 종이의 위치를 맞추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렇게 분업과 숙련된 기술이 맞물리면서 같은 품질의 그림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유럽 화가들이 감탄한 선명한 색면과 깔끔한 윤곽선은 바로 이런 제작 방식에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호쿠사이의 파도와 히로시게의 비는 무엇이 달랐을까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두 이름을 꼽으라면 단연 가쓰시카 호쿠사이와 우타가와 히로시게입니다. 호쿠사이는 1830년대 초에 후지산 서른여섯 경치 시리즈를 내놓았고 그중 가나가와 앞바다의 거대한 파도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그림이 되었습니다. 손톱처럼 휘어진 파도 아래로 작은 배들이 흔들리고 저 멀리 후지산이 조그맣게 자리 잡은 구도는 보는 사람을 단숨에 끌어당깁니다. 이 시리즈에는 당시 수입된 새로운 파란색 안료가 쓰였는데 이 깊고 선명한 파란색이 풍경화 유행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호쿠사이가 힘차고 극적인 구도로 자연의 에너지를 보여주었다면 히로시게는 조금 더 서정적이었습니다. 도카이도 53역참과 명소 에도 백경 같은 시리즈에서 히로시게는 비와 눈과 안개 같은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다리 위를 뛰어가는 사람들 위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쏟아지는 장면을 보면 그림인데도 빗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두 화가의 공통점은 대담한 구도였습니다. 앞쪽의 나뭇가지나 사물을 화면 가득 크게 배치하고 뒤쪽 풍경을 작게 보여주거나 그림의 가장자리를 과감하게 잘라내는 방식은 당시 서양 회화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이 낯선 시선이 훗날 유럽 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와 자포니슴의 열풍
일본이 오랜 쇄국을 끝내고 문을 열자 일본 물건이 본격적으로 유럽에 흘러들어 갔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였습니다. 일본이 처음으로 공식 참가한 이 박람회에서 우키요에와 공예품이 대거 소개되었고 파리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일본 미술에 열광했습니다.
이후 파리에는 일본 물건을 파는 가게가 속속 문을 열었습니다. 부채와 병풍과 기모노와 판화가 유행 상품이 되었고 1870년대 초 프랑스의 비평가 필리프 뷔르티는 이 현상을 자포니슴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일본 취향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예술 흐름이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화가들의 반응은 특히 뜨거웠습니다. 당시 젊은 화가들은 원근법과 명암을 철저히 지키는 아카데미의 전통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림자 없이 평평한 색면과 과감하게 잘린 구도와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담은 우키요에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교과서와 같았습니다. 에드가 드가는 무용수를 그릴 때 화면 가장자리를 대담하게 잘라내는 구도를 즐겨 썼고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의 포스터에서는 굵은 윤곽선과 평면적인 색채가 두드러집니다. 메리 커셋은 1890년 파리에서 열린 대규모 일본 판화 전시를 본 뒤 우키요에 기법을 응용한 판화 연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클로드 모네 역시 우키요에에 깊이 빠진 화가였습니다. 모네가 지베르니 집에 모은 일본 판화는 200점이 넘으며 그중에는 우타마로와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작품이 많습니다. 모네는 정원에 일본식 다리를 놓고 연못을 가꾸었으며 그 풍경을 수련 연작으로 남겼습니다.
고흐는 왜 히로시게의 그림을 유화로 따라 그렸을까
우키요에에 가장 뜨겁게 빠져든 화가를 꼽는다면 빈센트 반 고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고흐는 1886년 겨울부터 이듬해 사이 파리의 미술상 지크프리트 빙의 가게에서 무려 660점에 이르는 일본 판화를 사들였습니다. 반 고흐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처음에는 이 판화들을 되팔아 돈을 벌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고흐는 오히려 판화를 작업실 벽에 붙여 두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887년 가을 고흐는 자신이 가진 판화 세 점을 유화로 옮겨 그렸습니다. 히로시게의 가메이도 매화 정원을 그린 꽃 피는 매화나무와 소나기 내리는 다리 풍경을 옮긴 빗속의 다리 그리고 게사이 에이센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기녀였습니다. 고흐는 원작을 똑같이 베끼지 않았습니다. 색을 더 강렬하게 바꾸고 캔버스 테두리에 일본 글자를 장식처럼 그려 넣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 미술에 대한 동경을 여러 번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난 것도 그곳에서 일본처럼 밝은 빛과 색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고흐의 그림에서 보이는 선명한 원색과 굵은 윤곽선과 평면적인 배경은 우키요에에서 받은 영향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흐는 미래의 미술이 일본 판화처럼 밝고 즐거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값싼 대중 그림이 남긴 교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키요에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반전에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누구나 쉽게 사고 쉽게 버리던 대중 그림이 유럽에서는 미술의 방향을 바꾼 예술로 대접받았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사진과 새로운 인쇄 기술이 들어오면서 일본 안에서 우키요에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고 그사이 수많은 명작이 해외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뛰어난 우키요에 소장품 상당수가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에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으로 꼽힙니다.
또 하나 짚어볼 점은 자포니슴이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 흐름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일본을 신비롭고 이국적인 나라로 상상했고 그 환상이 작품 속에 담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우키요에의 대담한 구도와 평면적인 색채는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를 거쳐 현대 포스터 디자인과 만화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작곡가 드뷔시가 교향시 바다의 악보 표지에 호쿠사이의 파도를 넣었던 것처럼 우키요에의 영향은 미술 밖으로도 퍼져 나갔습니다.
국수 한 그릇 값의 목판화 한 장이 바다 건너 거장들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이야기는 예술의 가치가 가격이나 신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평범한 그림 한 장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키요에는 조용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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