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Edo) 세계 최대 도시가 된 이유, 갈대밭 어촌이 인구 100만 대도시로 변신한 놀라운 비밀

늪지대 작은 성 마을이 세계를 놀라게 한 이야기

지금의 도쿄를 떠올리면 하늘을 찌르는 빌딩과 끝없이 이어진 지하철 노선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런데 불과 400여 년 전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갈대밭과 작은 어촌이 흩어져 있던 한적한 땅이었습니다. 1457년 무사 오타 도칸이 작은 성을 쌓기는 했지만 누구도 이 땅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에도는 18세기 초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801년 조사에서 유럽 최대 도시였던 런던의 인구가 약 86만 명이었고 파리는 약 54만 명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에도가 얼마나 거대한 도시였는지 실감이 납니다. 당시 에도는 베이징과 함께 세계 최대 도시의 자리를 다툰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늪지대 위의 작은 성 마을은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성장을 이루었을까요. 그 뒤에는 한 사람의 선택과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운 거대한 공사와 모든 영주를 한 도시에 모이게 만든 독특한 제도가 숨어 있습니다. 에도가 세계 최대 도시로 성장한 260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따라가 보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왜 황량한 에도를 선택했을까

에도 이야기의 출발점은 1590년입니다. 당시 일본을 통일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래 다스리던 땅 대신 관동 지방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습니다. 겉으로는 넓은 땅을 준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가꿔 온 본거지를 빼앗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뜨리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에야스가 처음 도착했을 때 에도성은 낡고 초라했고 주변은 습지와 바닷가 갯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보통의 영주라면 실망했을 법한 환경이었지만 이에야스는 이 땅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에도 뒤로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평야인 관동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앞으로는 바다가 열려 있어 배를 이용한 물자 수송이 가능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거리였습니다. 교토와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약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존 세력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도시를 처음부터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조급해하지 않고 차근차근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1603년 쇼군에 오르면서 에도는 단숨에 일본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변방의 늪지가 권력의 심장부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운 거대한 토목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쇼군이 된 이에야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에도성 바로 앞에는 히비야 이리에라고 불리는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지금의 히비야 공원 일대가 원래는 바닷물이 넘실대던 곳이었던 셈입니다.

막부는 1603년 무렵부터 성 북쪽에 있던 간다산을 깎아 그 흙으로 히비야 이리에를 메우는 공사를 벌였습니다. 산 하나를 옮겨 바다를 땅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 생긴 평지 위에 상인과 장인들이 사는 마을이 들어섰고 도시는 빠르게 넓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공사를 막부 혼자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막부는 전국의 영주들에게 공사를 나누어 맡기고 인력과 비용을 부담하게 했습니다. 영주들의 돈과 힘을 빼면서 동시에 수도를 키우는 일석이조의 방식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에도의 상징과도 같은 니혼바시가 놓였습니다. 니혼바시는 전국으로 뻗어 나가는 다섯 개의 큰길 즉 오가이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도카이도와 나카센도 같은 길이 모두 이 다리에서 시작되었으니 에도는 말 그대로 일본 교통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사람과 물건이 모이는 길이 생기자 도시는 스스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근교대가 에도를 거대한 소비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에도가 세계 최대 도시가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역사가들은 참근교대 제도를 이야기합니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1635년 무가제법도를 고쳐 전국의 영주들이 정기적으로 에도에 와서 머물도록 의무화했습니다. 영주들은 보통 1년은 에도에서 1년은 자기 영지에서 번갈아 지내야 했고 정실부인과 후계자는 아예 에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원래 목적은 영주들을 감시하고 반란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을 사실상 인질로 잡아두고 오가는 비용으로 재정을 약하게 만들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는 막부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에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영주들이 에도에 저택을 짓고 수많은 가신과 하인을 거느리고 살게 되자 도시는 무사로 가득 찼습니다. 18세기 초에는 무사와 그 가족과 하인만 약 50만 명에 이르렀고 여기에 상인과 장인 약 50만 명이 더해져 전체 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생산보다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쌀과 옷감과 술과 간장이 끝없이 필요했고 이를 공급하기 위해 오사카와 교토 쪽에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가 줄을 이었습니다. 에도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되었고 그 수요를 채우려는 상인과 일꾼들이 다시 몰려들면서 인구는 계속 불어났습니다. 감시를 위해 만든 제도가 결과적으로 세계 최대 도시를 키운 엔진이 된 것입니다.

100만 명의 목마름을 해결한 물길과 강줄기의 비밀

사람이 100만 명이나 모이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물입니다. 에도는 바다를 메운 땅이 많아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오는 곳이 적지 않았습니다. 막부는 일찍부터 간다 상수를 만들어 도시에 물을 끌어왔지만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1653년부터 이듬해까지 다마가와 상수라는 대규모 수도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다마강 상류에서 물을 끌어와 약 40킬로미터가 넘는 수로를 따라 에도 시내까지 보내는 공사였습니다. 전기도 기계도 없던 시절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땅에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길을 낸 것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기술입니다. 도시 곳곳에는 땅속 나무관이 깔렸고 사람들은 공동 우물에서 이 물을 길어 썼습니다.

강줄기를 바꾼 공사도 있었습니다. 원래 에도만으로 흘러들던 도네강은 자주 넘쳐 에도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곤 했습니다. 막부는 수십 년에 걸쳐 도네강의 흐름을 동쪽으로 돌려 태평양 쪽으로 빠지게 하는 공사를 벌였고 1654년 무렵 큰 줄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에도는 홍수 위험을 줄였고 새로 생긴 물길은 관동 각지의 쌀과 물자를 에도로 실어 나르는 수운로가 되었습니다. 물을 다스린 것이 곧 도시를 키운 힘이었습니다.

명력 대화재의 잿더미가 오히려 더 큰 도시를 낳았습니다

순조롭게 성장하던 에도에 1657년 끔찍한 재앙이 닥쳤습니다. 바로 명력 대화재입니다. 80일 넘게 비가 오지 않아 도시 전체가 바싹 마른 상태에서 거센 바람을 타고 번진 불은 사흘 동안 에도를 휩쓸었습니다. 시가지의 60퍼센트 이상이 불탔고 사망자는 기록에 따라 수만 명에서 10만 명에 이른다고 전해집니다. 일본에서 가장 높았던 에도성의 천수각도 이때 불타 다시는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무와 종이로 지은 집들이 좁은 골목에 빽빽하게 붙어 있었으니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싸움은 에도의 꽃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에도는 늘 화재와 함께 살아야 하는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막부는 이 잿더미를 도시를 새로 설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곳곳에 넓은 빈터인 히로코지를 만들고 길을 넓혔습니다. 성 안에 있던 쇼군 일가의 저택과 절과 신사는 성 밖으로 옮겼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스미다강 건너편 개발이었습니다. 강에 료고쿠바시가 놓이면서 혼조와 후카가와 같은 동쪽 지역이 새로운 시가지로 열렸습니다. 소방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대화재는 에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더 넓고 튼튼한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전환점이었습니다.

에도가 남긴 교훈은 오늘의 도쿄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에도가 세계 최대 도시가 된 이유를 정리해 보면 한 가지 원인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넓은 평야와 바다를 품은 입지가 있었고 산을 깎아 바다를 메운 과감한 토목 공사가 있었습니다. 참근교대라는 정치 제도가 전국의 사람과 돈을 한곳으로 끌어모았고 상수도와 물길 공사가 100만 명의 생활을 떠받쳤습니다. 여기에 대화재 같은 위기를 도시 재설계의 기회로 바꾼 행정의 힘까지 더해졌습니다.

물론 에도에 밝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도시 면적의 대부분을 무사 저택과 절이 차지했고 인구의 절반가량인 서민들은 전체 땅의 약 20퍼센트에 불과한 좁은 구역에 몰려 살아야 했습니다. 좁은 나가야에서 부대끼며 사는 삶은 화재와 전염병에 늘 취약했습니다. 또 매립으로 넓힌 낮은 동쪽 땅은 이후 큰 재난이 닥칠 때마다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에도 사람들은 그 속에서 놀라운 도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혼자 일하러 온 남성이 많아 소바와 초밥과 튀김을 파는 노점이 발달했고 가부키와 출판과 우키요에 같은 서민 문화가 활짝 피어났습니다. 분뇨까지 거름으로 팔아 농촌으로 보내는 순환 구조 덕분에 거대한 도시가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1868년 에도는 도쿄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니혼바시에서 시작되는 길과 히비야의 매립지와 스미다강 건너의 시가지는 지금도 도쿄의 뼈대로 남아 있습니다. 갈대밭 어촌에서 세계 최대 도시가 된 에도의 이야기는 도시란 결국 사람의 계획과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조용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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