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귀족은 왜 이빨을 검게 칠했을까, 오하구로에 담긴 놀라운 진짜 이유

철가루와 식초로 만든 검은 물감

오하구로는 철가루를 식초 등의 용액에 담가 만든 검은 액체로 치아를 물들이는 일본의 전통 풍습입니다. 이 관습은 10세기 무렵 헤이안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자리 잡아 에도 시대를 지나 19세기 후반까지 무려 천 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헤이안 시대 공주가 결혼식을 치를 때 하던 특별한 화장법으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과 사무라이 계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오하구로라는 이름 자체도 존경의 뜻을 담은 접두어와 이를 뜻하는 글자 검다는 뜻의 글자가 합쳐진 표현으로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하나의 격식을 갖춘 용어로 자리 잡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 상당히 낯설고 심지어 기이하게 느껴질 수 있는 풍습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당연하게 여겨지던 미의 기준이자 사회적 약속이었습니다. 이 검은 치아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았는지 그 배경을 하나씩 짚어보면 단순한 취향의 문제를 넘어 당시 사회의 여러 단면이 함께 드러납니다. 오하구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당나라를 오가던 견당사를 통해 대륙의 화장 문화가 전해지면서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 풍습이 처음 자리 잡았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해석이 오가고 있습니다.

하얀 얼굴 옆에서 누런 이는 용납되지 않았다

오하구로가 유행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의 독특한 미적 기준에 있습니다. 헤이안 시대 여성들의 화장법은 얼굴 전체를 하얗게 분칠하고 원래 눈썹을 밀어낸 뒤 이마 위쪽에 새로운 눈썹을 그려 넣으며 입술은 붉게 강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새하얗게 분칠한 얼굴 옆에서 자연스러운 치아 색이 무척 도드라져 보였다는 점입니다. 지금처럼 치과 위생 관념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치아는 대체로 누렇게 보이기 마련이었고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그 누런빛이 오히려 더 지저분하게 도드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중간하게 누런 치아를 그대로 드러내느니 차라리 완전히 검게 물들여버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새까맣게 물든 치아는 오히려 깔끔하고 정돈된 인상을 주었고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에 치열이 고르지 않은 사람의 경우 이를 검게 칠하면 치아 사이의 틈이나 삐뚤어진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는 효과까지 더해지면서 오하구로는 여러모로 당시의 미적 기준에 딱 맞아떨어지는 화장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치아가 건강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지만 헤이안 시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정반대의 기준이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 환경과 유행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형성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눈썹과 이로 신분과 결혼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오하구로가 단순한 미용 기법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헤이안 시대에는 눈썹을 밀고 새로 그리는 히키마유라는 화장법이 오하구로와 짝을 이루며 함께 유행했는데 이 두 가지 화장법은 사실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표식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눈썹 모양만 보아도 그 사람이 귀족인지 평민인지 심지어 결혼을 했는지 자녀가 있는지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썹을 밀고 이마 위쪽에 새 눈썹을 그려 넣는 히키마유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귀족 신분의 여성에게만 허락된 특권과 같은 화장법이었습니다. 오하구로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상류층과 평민을 구별 짓는 하나의 표식으로 기능했습니다. 실제로 훗날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고 남긴 기록에도 창녀와 미혼 여성을 제외한 규수 여인들이 이빨을 검게 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하구로가 결혼한 여성 혹은 특정 신분을 나타내는 사회적 신호로 오랫동안 통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오하구로와 히키마유는 얼굴만 보고도 상대의 계급과 혼인 여부를 즉시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했던 셈입니다. 이렇게 겉모습만으로 상대의 신분과 결혼 여부를 즉각 구별할 수 있는 사회는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복잡한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예법을 지키는 데 나름의 효율적인 장치로 작동했습니다. 특히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서로의 신분과 혼인 여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은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는 데도 은근히 중요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치아를 지키기 위한 뜻밖의 지혜

오하구로에는 미용과 신분 표시 외에도 실용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습니다. 철가루와 식초를 발효시켜 만든 이 검은 용액을 치아 표면에 반복해서 바르면 일종의 코팅막이 형성되는데 이 막이 치아 표면을 산이나 세균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하는 효과를 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의 치아 실란트와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충치를 예방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치과 치료 기술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대에 이렇게 우연히 발견된 방법이 치아 건강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화학적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오하구로를 한 치아가 그렇지 않은 치아보다 상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체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미용적 효과와 실용적 효과가 우연히 맞물리면서 오하구로는 한 번 자리 잡은 뒤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랜 세월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하구로를 만드는 재료와 방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철가루를 우려낸 용액에 오배자 가루 등을 섞어 색을 더 진하게 만들거나 냄새를 줄이는 방법이 함께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용액 특유의 냄새가 상당히 강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불편함 역시 결코 작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만의 풍습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점은 오하구로가 처음부터 여성 전용 풍습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일본에서는 귀족 출신 남성들도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여성 특히 기혼 여성 중심의 풍습으로 굳어져갔지만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도 이 관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도 특정 종교 지도자가 남성임에도 오하구로를 하고 다녀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이니 이 무렵에는 이미 남성의 오하구로가 매우 예외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오하구로가 처음에는 신분과 격식을 드러내는 장치로 시작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결혼한 여성의 정절과 헌신을 상징하는 의미로 변모해갔음을 보여줍니다. 남편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짐하는 의미로 치아를 검게 물들인다는 해석이 후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하구로가 지닌 의미는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졌는데 처음에는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통과의례에 가까웠다가 점차 결혼이라는 구체적인 생애 단계와 결부되고 나중에는 정절과 헌신이라는 정서적인 의미까지 더해지는 방식으로 그 상징성이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서양 문물과 함께 저물어간 천 년의 미의식

이렇게 천 년 가까이 이어지던 오하구로 풍습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메이지 시대의 개혁이었습니다. 서구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서양식 기준에서 볼 때 오하구로는 낯설고 기이한 풍습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메이지 천황의 황후가 일본 궁중에서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으면서 동시에 오하구로를 그만둔 사건이었습니다. 황후가 먼저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자 그 아래 공주와 후궁 그리고 여러 귀족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르게 되었고 결국 정부 차원에서 관련 금지령까지 내려지면서 오하구로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한때 세련됨과 신분의 상징이었던 검은 치아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낡고 촌스러운 풍습으로 뒤바뀐 셈입니다. 이는 단순한 미용법 하나의 변화가 아니라 서구화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일본인들의 몸과 얼굴 위에까지 고스란히 새겨진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하구로가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황후가 서양식 의복을 받아들인 이후 불과 몇 년 사이에 궁중과 상류층 사회에서 오하구로를 하는 여성을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이후 관련 금지령까지 더해지면서 이 풍습은 급속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천 년 가까이 이어진 관습이 한 세대도 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은 미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회적 권위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합니다. 결국 오하구로의 흥망은 미의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대와 권력의 흐름에 따라 쉽게 뒤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사진과 그림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풍습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걸쳐 지키고 가꾸어야 할 당연한 미의 기준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미용 관념 역시 훗날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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