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발해의 뒤를 잇는 새로운 시대, 후삼국과 고려의 건국 이야기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며 번성했던 남북국시대가 저물고, 역사의 물줄기는 다시금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통일신라는 오랜 평화 속에서 내부의 모순이 곪아 터지고 있었고, 발해는 거란의 침략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멈추지 않고,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새로운 세력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후삼국시대라는 혼돈의 시대를 거쳐, 마침내 고려라는 통일 왕조가 탄생하는 드라마틱한 과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혼란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과 성장의 역사를 따라가며, 이들이 어떻게 한반도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갔는지 심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과연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줄까요?

통일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시대의 시작

통일신라는 9세기 말에 이르러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됩니다. 중앙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고, 왕권은 약화되었습니다. 진성여왕 시기에는 세금 독촉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원종과 애노의 난이었으며, 이후에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 떼인 적고적(적고적: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 떼)들이 나타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자,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는 호족(호족: 지방에서 독자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나 장군을 칭하며 지방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의 멸망을 촉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인물들이 바로 견훤과 궁예였습니다. 견훤은 원래 신라의 군인이었으나,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무리를 이끌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 견훤은 신라를 계승한다는 명분보다는, 새로운 강대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궁예는 신라의 왕족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몰락한 왕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승려가 되어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북원(지금의 원주)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901년에는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지금의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이후 911년에는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전제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라는 세 개의 나라가 공존하는 후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후백제의 성장과 몰락

견훤이 세운 후백제는 백제의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견훤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과감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는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하며 영토를 넓혀나갔고, 한때는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점령하며 신라에 큰 위협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견훤은 해상 무역을 장악하여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다졌습니다.

그러나 후백제 내부에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견훤은 지나치게 무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민심을 얻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말년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아들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첫째 아들인 신검과 넷째 아들인 금강 사이의 후계 다툼이 발생했고, 결국 신검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지금의 김제)에 유폐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했고, 이는 후백제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투항은 후백제 내부의 혼란을 더욱 심화시켰고, 결국 936년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후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궁예의 후고구려와 왕건의 등장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는 초기에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습니다. 궁예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신라의 지배 체제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궁예는 점차 폭정(백성을 억압하고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정치)을 일삼고 미륵불을 자처하며 자신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등 전제적인 통치 방식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관심법(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며 사람을 의심하고 처벌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숙청했으며, 이는 민심 이반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궁예의 폭정에 반발하여, 그의 부하였던 왕건은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왕건은 개경(지금의 개성)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고려라고 정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북방의 광대한 영토를 회복하고 고구려의 기상을 되살리겠다는 왕건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건국 초부터 민생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세금을 줄이고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등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그는 호족들과의 연합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왕건의 통일 전략과 고려 건국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치밀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는 후백제와 신라를 상대로 때로는 강경책을, 때로는 회유책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신라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흡수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자발적으로 항복하면서 신라는 멸망하고, 고려는 신라의 영토와 백성을 자연스럽게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왕건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후백제에 대해서는 무력 통일을 추진했습니다. 견훤의 망명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격할 명분을 주었고, 왕건은 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936년,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과 함께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사력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결국 후백제의 신검은 고려에 항복하게 됩니다. 이로써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인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건국은 단순히 삼국을 재통일하는 것을 넘어선 의미를 지닙니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것과 달리, 고려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여 북방 영토 수복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으며, 이는 이후 고려의 대외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의 건국 이념과 초기 정책

고려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민족의 화합과 안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왕건은 훈요십조(고려 태조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열 가지 교훈)를 통해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통치 이념과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훈요십조에는 불교를 숭상하고, 풍수지리설을 중요하게 여기며, 거란을 경계하고, 후백제와 신라의 유민들을 포용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가 다양한 세력들을 아우르며 안정적인 국가를 운영하려는 왕건의 깊은 뜻을 보여줍니다.

왕건은 또한 호족들을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 세력으로 편입시켰고, 사성 정책(왕족의 성씨인 왕씨를 내려주어 호족들을 포섭하는 정책)을 통해 호족들의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또한, 기인 제도(지방 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는 제도)나 사심관 제도(지방의 유력자나 관료에게 출신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게 한 제도)를 통해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호족들의 정치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고려는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점차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고려의 안정과 발전

고려 왕조는 광종 대에 이르러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광종은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비안검법(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양민으로 해방시켜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약화시킨 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또한, 과거 제도(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혈연 중심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관료층을 육성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광종은 왕권을 크게 강화하고, 고려를 명실상부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시켰습니다.

성종 대에는 유교 정치를 확립하고 체제 정비에 힘썼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국자감(국자감: 고려 시대의 최고 교육 기관)을 정비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하고,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사회 질서를 안정시켰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고려는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후삼국과 고려 건국이 주는 교훈

후삼국시대의 혼란과 고려의 건국 과정은 우리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남깁니다. 통일신라의 쇠퇴는 중앙 정부의 무능과 지방 세력의 성장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견훤과 궁예의 등장은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진정한 정치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폭정을 일삼았던 궁예는 결국 백성들의 외면을 받았고, 왕위 계승 다툼으로 내부 분열을 겪었던 후백제 또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반면, 왕건은 민심을 얻고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무력 통일을 넘어, 민족의 화합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이는 고려가 474년이라는 긴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혼란 속에서 리더의 역할과 통합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왕건의 사례는 폭력과 강압보다는 포용과 이해가 진정한 통일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 #후삼국시대 #왕건 #견훤 #궁예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