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는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개경(현재 개성)을 중심으로 한 문벌 귀족들의 권력 독점과 부패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승려 묘청입니다. 묘청은 서경(현재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새롭게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서경 천도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는 고려 사회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과연 묘청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가 추진했던 서경 천도 운동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새로운 변화의 목소리
이자겸의 난은 고려 사회의 심각한 모순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개경의 문벌 귀족들은 여전히 특권을 누리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종(고려 17대 임금)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부패한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고려의 문신으로 묘청과 함께 서경 천도를 주장한 인물) 등이 인종의 눈에 띄게 됩니다.
묘청은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땅의 기운과 방향을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상)과 도참 사상(미래의 길흉을 예언하고 길한 방도를 제시하는 사상)에 능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개경의 지덕(땅의 기운)이 쇠퇴하여 고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 주장하며,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만 나라가 번영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인종 또한 묘청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묘청, 서경 천도와 자주적인 국가를 꿈꾸다
묘청과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서경 세력은 단순한 천도(수도를 옮기는 것)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을 발판 삼아 고려를 자주적인 강대국으로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요 주장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서경 천도: 개경의 지덕이 쇠퇴했으니, 상서로운 기운이 넘치는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서경에 대화궁(서경에 지으려 했던 새로운 궁궐)이라는 대규모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칭제건원(稱帝建元): 고려 국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왕조의 연도를 세는 고유한 이름)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송나라의 신하국처럼 지내던 고려의 사대주의(큰 나라를 섬기는 태도)적 성격을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셋째, 금국 정벌: 당시 요동 지방을 장악하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위협하던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습니다. 이는 고려가 더 이상 금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북방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인종은 처음에는 묘청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경 천도 준비를 진행하고, 묘청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개혁을 추진하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개경의 문벌 귀족들은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금국 정벌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특히 김부식(고려의 문신이자 역사가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반대하고 진압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개경 세력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유교적 명분을 들어 묘청의 주장을 비판했습니다.
서경 천도 운동의 좌절과 묘청의 난
개경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인종의 서경 천도 의지는 점차 약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경에 지으려던 대화궁에서 여러 차례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거나 공사 도중 문제가 생기자, 개경 세력은 이를 빌미로 천도의 부당성을 더욱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파는 자신들의 개혁이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칭하며 고려로부터 독립적인 세력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의 관군(국가의 정규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서경을 포위했고, 반란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묘청은 함께 난을 주도했던 조광(묘청의 동조자였으나 배신하여 묘청을 죽인 인물)에게 살해당했고,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묘청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 진보인가, 반역인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실패했지만, 한국사에서 그를 평가하는 시각은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근대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는 묘청을 '조선 역사 1천 년 이래 제일 대사건'의 주인공으로 평가하며 그를 높이 샀습니다.
신채호의 평가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선구자):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낭불양가(불교와 도교) 대 한학파(유교)',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대결로 보았습니다. 그는 묘청이 칭제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며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자주당'이자 '진취당'의 대표였으며, 반면 김부식은 금나라에 사대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했던 '사대당'이자 '보수당'의 대표라고 보았습니다. 신채호는 묘청의 실패로 인해 고려의 자주적인 기상이 꺾이고 사대주의적 경향이 짙어져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고 비판하며 묘청을 자주적인 민족 운동가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김부식 중심의 전통적 평가 (왕실을 기만한 반역자): 묘청이 난을 일으킨 직후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김부식의 입장이 담긴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공식 역사서에서는 묘청을 풍수지리설로 임금을 현혹하고 반란을 일으킨 '간흉(간사하고 흉악한 자)'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를 사이비 종교인이나 권력욕에 눈먼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난은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단순한 반역 사건으로 치부했습니다. 이는 유교적 합리주의와 왕조의 안정성을 중시했던 당시 지배층의 시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현대적 재평가 (한계와 의의): 현대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단순히 선과 악,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두 가지로 나누는) 대결로만 보지 않습니다. 묘청의 주장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비현실적이거나, 준비가 부족했다는 한계점도 지적합니다. 특히 금국 정벌 주장은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였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묘청의 운동이 이자겸의 난 이후 혼란스러웠던 고려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왕권 강화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를 재확립하려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합니다. 또한, 개경 중심의 문벌 귀족 사회에 대한 지방 세력의 도전이자, 자주적인 국가를 지향했던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고려 사회의 복잡한 면모와 다양한 세력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여전히 다양한 해석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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