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북진정책과 여진 정벌, 그리고 윤관 장군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북진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거란과 여진 등 북방 민족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을 중요한 국가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북진정책은 고려의 중요한 기조였지만, 때로는 강대했던 거란의 위협에 직면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이 점차 쇠퇴하고 여진족이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면서, 고려는 다시 한번 북방 개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여진 정벌 후 윤관이 동해안 일대에 쌓은 9개의 성)을 축조한 인물이 바로 윤관 장군입니다.

거란의 쇠퇴와 여진족의 부상

11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거란(요나라)은 내부적인 분열과 송나라와의 대치 속에서 점차 국력이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만주 지역의 여진족은 점차 세력을 규합하며 강력한 부족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고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거나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 일부가 점차 세력을 키워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고려-거란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북방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거란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북진정책을 다시 추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진족은 압록강 일대와 함경도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으며 고려의 평화를 위협했고, 이는 고려에게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여진족의 준동을 막고 안정적인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적 대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윤관의 등장과 별무반의 조직

여진족의 침략이 거세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이때 윤관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배를 경험하며, 기존의 고려군으로는 기마 전술에 능한 여진족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는 숙종(고려 15대 임금)과 예종(고려 16대 임금)에게 강력하게 별무반(別武班)의 조직을 건의했습니다.

별무반은 기존의 보병 중심의 군대와는 달리, 여진족의 기마 전술에 대응하기 위한 특수 부대였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병종(군대의 종류)들이 포함되었습니다.

  • 신기군(神騎軍): 기병(말을 타고 싸우는 군사)으로 구성된 핵심 부대로, 여진족의 기동력에 맞설 수 있는 정예 부대였습니다.

  • 신보군(神步軍): 보병(도보로 싸우는 군사)으로 구성되었으나, 기병을 보조하고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 항마군(降魔軍): 승려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로, 불교적 신앙심을 바탕으로 사기를 높이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윤관은 이러한 별무반을 조직하는 데 약 2년의 시간을 투자하여 충분한 훈련과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는 단순히 병력을 늘리는 것을 넘어, 여진족의 전투 방식에 특화된 새로운 군사 체계를 구축하려는 윤관의 전략적 혜안(깊이 있는 통찰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

별무반의 준비가 완료되자, 1107년(예종 2년) 윤관은 원수(군대의 총사령관)로서 약 17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섰습니다.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은 잘 훈련된 별무반의 강력한 전력을 바탕으로 여진족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특히, 기동성을 자랑하는 신기군의 활약은 여진족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여진족을 몰아낸 윤관은 그들의 본거지였던 함경도 지역에 동북 9성을 축조했습니다. 이 9개의 성은 길주(현재 북한 길주) 일대에서 두만강 하류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이는 고려의 영토를 북쪽으로 크게 확장했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윤관은 동북 9성에 백성들을 이주시켰고, 병력을 주둔시켜 새로운 국경선을 방어하려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여진족을 물리치는 것을 넘어, 고려의 실질적인 영토로 편입하려는 적극적인 북진정책의 결과였습니다.

동북 9성 반환과 그 배경

그러나 동북 9성 축조 이후에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여진족은 자신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또한, 동북 9성에 이주한 고려 백성들이 낯선 환경과 계속되는 여진족의 공격으로 고통받았고, 이들을 방어하는 데 막대한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면서 고려의 재정 부담도 커졌습니다.

결국, 동북 9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 아래, 고려 조정은 동북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합니다. 1109년(예종 4년), 윤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북 9성은 여진족에게 반환되었습니다. 이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일시적으로 좌절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고려가 처한 국제 정세와 내부적인 부담을 고려한 고육지책(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북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은 이후 세력을 더욱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고, 오히려 고려에 사대(큰 나라를 섬기는 것)를 요구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윤관의 역사적 의미

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축조는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북진정책의 구체적인 실현: 비록 동북 9성이 반환되긴 했지만, 윤관의 여진 정벌은 고려의 북진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이라는 고려의 건국 이념을 계승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둘째, 군사 전술의 혁신: 별무반의 조직은 고려가 당시의 국제 정세와 적의 특성에 맞춰 군사 체계를 혁신하려는 노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한 윤관의 군사적 식견(사물을 분별하는 지식과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셋째, 자주 의식의 발현: 윤관의 여진 정벌은 강대국으로 성장하던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자주적인 대응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금나라의 사대 요구에 직면했을 때 고려 내부에서 자주적인 외교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가 됩니다.

윤관은 비록 동북 9성 유지에 실패했지만, 그의 용기와 지혜는 고려의 국방력을 강화하고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의 상징으로 길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고려의 북방 개척사와 국난 극복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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