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선조의 파천, 버려진 백성과 압록강을 향한 왕의 눈물

1592년 4월, 200년간의 평화를 깨고 20만 대군을 앞세운 일본의 침략은 조선의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왜군 앞에 조선의 관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된 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은 함락의 위기에 처합니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군주, 선조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 종묘사직을 등지고 북으로 향하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립니다. 바로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피난길로 기록된 파천(播遷)입니다. 버려진 백성들의 분노와 절규를 뒤로한 채, 압록강까지 이어졌던 선조의 처절했던 피난길은 오늘날 우리에게 지도자의 책임과 국가의 의미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한양을 버리다, 불타는 궁궐과 등 돌린 민심

1592년 4월 28일, 조선 최후의 보루라 믿었던 신립 장군의 충주 탄금대 전투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더 이상 한양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선조와 신하들은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비통한 심정으로 궁궐을 나섰습니다. "내가 마땅히 사직과 함께 죽어야 하지만,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끊기게 할 수는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백성들의 눈에는 그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비겁한 왕의 모습으로 비쳤을 뿐입니다. 왕이 떠난 도성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습니다. 임금에게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인 백성들은 스스로 궁궐에 불을 질렀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차례로 화염에 휩싸였고, 특히 노비 문서를 보관하던 장례원(掌隷院)과 형조는 가장 먼저 불길에 사라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방화가 아니라, 억압적인 신분제와 무능한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처절한 저항이었습니다.

비와 눈물 속의 피난길, 개성을 지나 평양으로

칠흑 같은 어둠과 쏟아지는 비를 뚫고 시작된 선조피난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왕을 호위해야 할 군사들은 흩어져 도망가기 바빴고, 굶주린 어가(임금이 타는 수레) 행렬은 백성들의 원망과 조롱을 받아야 했습니다. 파주의 한 목사는 왕에게 바칠 음식을 호위병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쳤고, 어떤 이들은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가까스로 개성에 도착한 선조는 임진강 방어선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이마저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일본군이 한양에 무혈입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다시 황급히 북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명합니다. 자신은 평양에 머물며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광해군은 강원도와 함경도 등지로 가서 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광해군이 전란 속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압록강 앞에서 망설이다, 요동으로 망명하려 한 왕

평양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의 칼날은 턱밑까지 차올랐고, 평양성마저 지킬 수 없게 되자 선조는 결국 국경 도시인 의주를 향해 다시 피난을 떠납니다. 이 시기 선조의 마음속에는 조선을 떠나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하들에게 "차라리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요동으로 건너갈 뜻을 수차례 내비쳤습니다. 이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발상으로 비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왕이 잡히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절박함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류성룡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어가가 우리 땅을 떠나는 순간,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라며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만약 이때 선조가 정말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의주 행궁의 초라한 조정, 희망의 불씨를 보다

1592년 6월 22일, 한양을 떠난 지 50여 일 만에 선조는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의주에 도착합니다. 국경 너머 명나라 땅이 보이는 초라한 행궁(임금이 궁궐 밖에서 임시로 머무는 곳)에 조선의 조정이 세워진 것입니다. 의주에서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조정의 통치력은 거의 미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왕이 의주에 있다'고 왜군에게 알리는 낙서를 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남쪽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의 낭보를 울렸고, 전국 각지에서는 곽재우, 고경명 등 수많은 의병장들이 분연히 일어나 왜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또한 아들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는 무너진 조정을 대신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으며 전쟁을 독려했습니다. 이러한 희소식들과 마침내 도착한 명나라의 원군은,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선조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도망친 왕과 남겨진 영웅들, 그 역사의 교훈

선조파천은 조선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고 지도자가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국경 끝까지 도망쳤다는 사실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 그의 피난길 내내 백성들이 보여준 분노와 저항은 국가와 왕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역사는 단선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의 파천이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떠난 자리를 이순신과 같은 위대한 장수, 이름 모를 수많은 의병, 그리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평범한 백성들이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선조의 처절했던 피난길은 우리에게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이며, 위기의 순간에 나라를 지키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되묻게 하는 쓰라린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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