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는 수많은 외침과 민란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붕당(朋黨)’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흐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학문적 동지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사림(士林) 세력이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면서 시작된 대립은 단순한 정권 다툼을 넘어, 예학(禮學) 논쟁에서부터 왕위 계승 문제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었습니다. 숙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피의 숙청으로까지 번졌던 남인과 서인의 대립. 과연 무엇이 이들을 돌이킬 수 없는 정적으로 만들었을까요? 그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학문의 동지에서 정치적 라이벌로, 붕당의 시작
남인과 서인의 뿌리는 조선 중기 사림 세력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훈구파의 독재에 맞서 싸우며 성장한 사림은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것도 잠시, 그들은 이조전랑(吏曹銓郞, 인사권을 가진 핵심 요직)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며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사림의 영수였던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 세력과, 척신 정치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세력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이때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東)에 있었기에 그를 따르는 무리를 동인(東人)이라 불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西)에 있었기에 그를 따르는 무리를 서인(西人)이라 칭하게 된 것이 붕당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동인은 다시 정여립의 난을 계기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인이 광해군 시대에 정권을 잡았다가 인조반정으로 몰락하면서, 조선의 정치 무대에는 남인과 서인만이 남아 본격적인 양당 체제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초기 붕당은 학문적 입장을 같이하며 서로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건전한 정치 집단의 성격이 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 예송논쟁의 불씨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사건은 바로 현종 대에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예송논쟁(禮訟論爭)이었습니다. 이는 효종과 효종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인조의 계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벌인 치열한 학술 논쟁이자 정치 투쟁이었습니다.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지만 차남(次男)이었기 때문에, 왕가 역시 사대부와 마찬가지로 '주자가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자의대비는 1년 상복(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특별한 예법(왕자례부동사서)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즉, 효종이 왕통을 이었으므로 장남(長男)과 다름없으니, 자의대비는 3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단순히 상복을 입는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왕위의 정통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서인은 왕이라도 예외일 수 없다는 ‘신권(臣權)’을 강조한 것이고, 남인은 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라는 ‘왕권(王權)’을 옹호한 것입니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했지만, 2차 예송에서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남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피바람의 서막, 숙종 시대의 환국 정치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국을 운영했습니다. 그는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이른바 환국(換局)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인과 서인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첫 번째 환국인 경신환국(1680)은 남인에게 내려진 사약과도 같았습니다.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의 서자가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있자, 숙종은 이를 빌미로 남인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서인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윤휴, 허목 등 남인의 거두들이 이때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9년 뒤, 기사환국(1689)으로 정국은 다시 한번 뒤집힙니다. 숙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장씨(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 아들을 원자(元子)로 삼으려 했습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이를 시기상조라며 강력히 반대하자,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서인을 몰아낸 뒤 남인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이 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으며, 남인은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서인의 재집권과 남인의 몰락, 갑술환국
권력의 단맛은 길지 않았습니다. 5년 뒤인 1694년, 숙종은 폐위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를 눈치챈 남인이 서인을 역모로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숙종은 오히려 이를 빌미로 남인을 다시 숙청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입니다. 이 사건으로 희빈 장씨는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고, 정권을 잡았던 남인 세력은 재기 불능의 치명타를 입고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됩니다. 이후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며 자신들의 싸움을 이어갔지만, 남인은 긴 시간 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대립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
남인과 서인의 대립은 조선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건전한 비판과 견제의 균형이 무너지자, 붕당은 오직 상대방을 제거해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극단적인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특히 숙종의 환국 정치는 이러한 대립을 더욱 격화시켜 수많은 인재를 희생시키고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대립이 부정적인 영향만 남긴 것은 아닙니다. 예송논쟁과 같은 치열한 학술적 논쟁은 조선의 성리학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권력이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막고,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이 공존하며 조선 사회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순기능도 일부 있었습니다. 남인과 서인의 역사는 우리에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치가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그리고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시대를 넘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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