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품고 예술로 조화를 빚어내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음악 통치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기억되는 세종대왕은 단순히 과학과 문자 분야에서만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조선의 음악과 예술이 가장 찬란하게 꽃피운 시기였으며, 세종대왕음악을 단순한 여흥(즐기는 놀이)이 아닌,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 수단, 즉 '통치의 예술'로 인식했습니다. 세종대왕에게 음악은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마음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조화가 곧 사회의 조화로 이어진다고 믿었으며, 이를 통해 이상적인 조화로운 사회 실현을 꿈꾸었습니다. 과연 세종대왕은 어떤 방식으로 음악을 통해 백성을 다스리고, 조선의 예악(예절과 음악) 문화를 격상시킬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세종대왕의 섬세하고 예술적인 통치 방식, 즉 음악을 통한 위대한 치세를 깊이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예악을 바로 세우다: 아악(雅樂)의 철저한 정비

세종대왕 시대의 음악 정책은 아악(雅樂, 궁중에서 국가 의식에 사용되던 정통 음악)의 정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악은 국가의례와 제사에 사용되는 매우 중요한 음악이었지만, 조선 건국 초기까지는 그 연주법이나 악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특히 고려 말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온 아악 악기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훼손되거나 소실(사라짐)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아악의 부실함을 바로잡는 것이 곧 왕실의 권위와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박연(朴堧)과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 전문가들을 등용하여 아악 정비에 착수하도록 했습니다. 먼저 악기의 재료, 형태, 음률(음의 높낮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중국의 고전 자료를 탐구하고 실제 악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지식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종대왕은 편경(돌로 만든 악기)에 쓰일 경석을 구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탐사대를 파견하는 등 집념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는 한국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악기들을 제작하고, 음률의 기준을 확립하여 조선의 아악을 완벽하게 정비해 냈습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혼란스러웠던 예악을 바로 세움으로써, 국가의례에 품격을 더하고 통치 이념을 확립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궁중 음악을 백성에게 돌리다: 향악의 발전과 여민락

세종대왕음악 통치는 단순히 어렵고 복잡한 아악 정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즐겨 듣고 공감할 수 있는 향악(鄕樂,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의 발전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세종대왕향악을 발전시켜 백성과 왕이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정서를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향악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여민락' (與民樂,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의 음악)입니다. 여민락은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세종대왕민본정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입니다. 그는 음악이 계층을 초월하여 모든 백성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세종대왕은 기존의 중국 음악 일색이었던 궁중 연회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음악향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를 위해 아악기와 향악기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새로운 악보 기보법(음악을 기록하는 방법)인 정간보를 창안(새롭게 만들어 냄)했습니다. 정간보는 세계 최초의 유량악보(시간의 길이를 표시할 수 있는 악보)로 평가받으며, 세종대왕의 과학적 음악적 통찰력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업적입니다. 이러한 향악의 발전은 궁중 음악이 더 이상 지배 계층만의 전유물(특정 계층만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사회 실현을 위한 도구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술의 표준을 제시하다: 악학궤범 편찬의 초석

세종대왕음악을 단순한 연주를 넘어,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야로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악학궤범(樂學軌範) 자체는 성종 때 완성되었지만, 그 토대와 핵심적인 내용, 그리고 음악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의 필요성은 세종대왕 시대에 이미 확립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아악 정비, 정간보 창안, 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악곡을 작곡함으로써, 후대에 음악을 연구하고 계승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자료와 이론적 기반을 남겼습니다.

그는 악기의 제작 방법, 연주법, 음악 이론, 그리고 국가의례에서 음악이 사용되는 절차 등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기록 정신은 후대의 학자들이 세종대왕 시대의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악학궤범과 같은 대규모 음악 백과사전을 편찬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이 남긴 수많은 악보와 음악 이론 연구는 조선의 음악을 일회성이 아닌, 영구히 지속 가능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지적 유산입니다. 이처럼 세종대왕음악에 대한 통치자의 깊은 이해와 학문적 열정으로 조선 예악 문화의 영구적인 표준을 제시했습니다.

이치를 담은 소리: 편경과 편종의 완벽한 제작

세종대왕음악적 업적 가운데 과학 기술과 통치 이념이 가장 완벽하게 결합된 사례는 편경과 편종(종으로 만든 악기)의 제작 성공입니다. 편경과 편종은 아악 연주에 사용되는 필수적인 악기로, 이 두 악기가 정확한 음을 내야만 아악 전체의 조화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정확한 음을 내는 악기를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중국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자주(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하는 것)'의 정신을 바탕으로 악기 국산화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박연과 함께 음악의 기본인 12율려(음악에서 사용하는 12개의 표준 음)를 정확히 측정하고, 재료의 선정부터 가공,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세밀하게 감독했습니다. 특히 편경 제작에 사용되는 경석은 미세한 흠집이나 두께 차이에도 음정이 변하기 때문에 제작 난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정확한 음률을 구현하여 완벽한 편경과 편종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과학적, 기술적 역량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건이었으며, 이 완벽한 음악 악기들은 세종대왕 시대 조화로운 사회 실현이라는 통치 이념을 소리로 구현해 낸 상징물이었습니다.

예술로 백성의 정서를 보듬다: 치화의 정치

세종대왕음악을 통해 백성의 정서적 안정과 화합을 도모하는 '치화(治化)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음악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단순히 궁중에서 음악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업 노동요를 정비하고 보급하여 백성들이 일터에서도 음악을 통해 활력을 얻고 노동의 효율을 높이도록 했습니다.

또한, 음악에 담긴 가사(노랫말)를 통해 유교적 윤리와 도덕을 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음악은 복잡한 교리를 설명하는 대신, 감성적인 접근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 수 있는 강력한 교육 수단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음악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만드는 도구로 인식했으며, 이는 곧 왕도 정치(왕이 도덕을 바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의 실현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펼친 음악을 통한 정치는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사회 실현을 위한 통치자의 예술적이며 인문적인 노력이었습니다.

세종의 음악, 시대를 초월하여 조화를 노래하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음악을 한 단계 끌어올린 위대한 예술가이자 통치자였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아악정비되었고, 향악은 발전했으며, 정간보라는 독창적인 악보가 창안되었습니다. 비록 악학궤범의 완성은 다음 세대로 넘어갔으나, 세종대왕이 구축한 방대한 음악적 기반과 학문적 정신이 없었다면 조선의 예악 문화는 결코 그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에게 음악은 왕과 백성, 하늘과 땅을 잇는 통치의 철학이었습니다. 음악을 통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민본정치 정신은 여민락과 같은 아름다운 곡들에 영원히 담겨 있습니다. 세종대왕음악으로 다스리고자 했던 조화로운 사회 실현의 꿈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진정한 통치의 지혜와 예술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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