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 단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여섯 명의 충신, 바로 '사육신'에 대한 가슴 시린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서울 노량진에 가면 사육신 공원이 있습니다. 지금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곳에는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여섯 남자의 피 끓는 역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권력의 비정함 앞에서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용기, 그리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맹목적인 충성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이들은 왜 그토록 무모해 보이는 길을 선택했을까요? 오늘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의로움을 택한 사육신의 마지막 순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피로 물든 왕좌, 계유정난과 단종의 비극
사육신의 거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불과 12살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왕은 어리고 어머니도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왕실의 어른이자 야망가였던 수양대군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압박하여 왕위를 물려받게 되니, 그가 바로 조선 제7대 왕 세조입니다. 겉으로는 선양(왕위를 물려줌)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강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세종대왕이 "어린 손자를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했던 유언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세조의 즉위를 불의로 규정했습니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왕위 계승의 정통성은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그들에게 세조는 왕이 아니라, 조카의 자리를 뺏은 부도덕한 찬탈자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억울하게 물러난 상왕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비밀스러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육신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날, 거사의 계획과 긴장감
단종 복위 운동의 핵심 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습니다. 이들은 무신인 유응부,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등과 규합하여 구체적인 거사 날짜를 잡았습니다. 기회는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열리는 명나라 사신 환영 연회였습니다. 이날은 세조와 단종(상왕)이 함께 참석하는 자리였기에, 호위무사들이 세조를 처단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려는 대담한 계획이었습니다.
계획의 핵심은 왕의 곁에서 호위를 담당하는 '운검'이었습니다. 운검으로 내정된 사람은 바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였습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이들이 칼을 뽑아 세조를 벤다면 거사는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집현전 학사들의 치밀한 두뇌와 무신들의 결단력이 합쳐진,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거사 당일 아침에 변수가 생겼습니다. 연회 장소가 좁고 덥다는 이유로 세조가 갑자기 "오늘은 운검을 세우지 말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무기를 든 호위무사가 왕 옆에 설 수 없게 되자,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를 강행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약 실패하면 훗날을 도모할 수 없다"며 신중론을 펼쳤고, 결국 거사는 다음 기회로 미뤄지고 말았습니다. 이 짧은 순간의 망설임이 훗날 엄청난 피바람을 몰고 오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배신과 체포, 그리고 시작된 잔혹한 국문
거사가 미뤄지자 불안감을 느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거사에 가담했던 '김질'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이 실패할 경우 자신과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김질은 장인인 정창손과 함께 급히 궁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모든 계획을 밀고하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격노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집현전 학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렸다는 사실에 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곧바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등이 줄줄이 체포되어 국문장으로 끌려왔습니다. 유성원은 집에서 체포되기 직전, 조상들의 위패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기개를 지켰습니다.
국문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세조는 직접 친국(왕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에 나섰습니다. 달궈진 인두가 살을 태우고, 뼈가 부러지는 고문이 이어졌지만, 사육신들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조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습니다. 이때 오고 간 대화들은 조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으리"라 부르며 세조를 부정한 성삼문의 기개
심문 과정에서 성삼문은 세조를 끝까지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세조를 "나으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왕을 인정하지 않고, 종친 중 한 사람으로 낮춰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세조가 "네가 나를 섬기며 녹봉(월급)을 받아먹고도 어찌 배신을 하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다. 나으리가 준 녹봉은 하나도 쓰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으니 가서 확인해 보라."
실제로 성삼문의 집을 뒤져보니 세조가 즉위한 이후 받은 녹봉은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굶어 죽을지언정 불의한 권력이 주는 혜택은 받지 않겠다는 꼿꼿한 선비 정신을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달궈진 쇠로 다리를 뚫는 모진 고문 앞에서도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 오라"고 호통쳤던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전율하게 만들었습니다.
박팽년의 '거'와 유응부의 무인 정신
박팽년의 일화 또한 유명합니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지금이라도 잘못을 빌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네가 올린 상소문에 나를 신하(臣)라고 칭하지 않았느냐"는 세조의 물음에 박팽년은 "나는 신(臣) 자를 쓴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그가 올린 문서에는 신하 신(臣) 자 대신, 클 거(巨) 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자신은 결코 세조의 신하가 아니라는 뜻을 문서에 몰래 남겨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지독한 고집이자 충성심이었습니다.
무신이었던 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면서 선비들인 성삼문 등을 향해 "글 읽는 자들과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더니, 거사를 미루다 이 꼴이 되었다"며 탄식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조에게 "내 칼로 너를 베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무인의 기백을 보여준 것입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충신들과 남겨진 가족들의 비극
결국 이들은 모두 '대역죄인'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반역죄는 능지처사나 거열형이라는 끔찍한 형벌로 다스려졌습니다. 거열형은 죄인의 팔과 다리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잔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지성들이자 충신이었던 이들은 한강 백사장(지금의 노량진 근처 새남터)에서 참혹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에 따라 그들의 아버지와 아들, 형제들까지 모두 처형당했습니다. 집안의 남자들은 씨가 말랐고, 여자들은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습니다. 명문가였던 가문들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죽임을 당했는데, 박팽년의 가문만이 유일하게 혈육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박팽년의 며느리가 낳은 아들을 여종이 낳은 딸과 바꿔치기하여 몰래 키웠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훗날 박팽년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후대에 다시 피어난 사육신의 충절
세조 당시에는 '난신적자(나라를 어지럽히는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사육신. 하지만 역사는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등용되면서 사육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반역이 아니라, 유교적 이념인 '충(忠)'을 실천한 최고의 모범 사례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복구되고, 정조 대에는 이들을 기리는 서원이 세워지는 등 완전히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반역자'가 아닌 '사육신'이라 부르며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여준 행동이 일신의 영달이 아닌, 자신이 믿는 올바른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숭고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육신이 던지는 질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서면 강물은 무심하게 흐르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여전히 뜨겁습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건 여섯 신하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충성스러운 신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목숨과 바꿀만한 소중한 가치가 있는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성공과 이익만이 최우선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사육신의 어리석을 만큼 우직한 신념은 우리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 됩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고 육신은 찢겨나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패배한 자가 남긴 정신이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을 사육신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슬픈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용어 설명)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김종서 등 반대파 신하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정치적 정변을 말합니다.
운검(雲劍): 조선 시대에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호위하는 무관이나 그들이 찼던 칼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요한 행사 때 왕의 좌우에 섰습니다.
친국(親鞫): 역모와 같은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왕이 직접 죄인을 심문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열형(車裂刑): 죄인의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매우 잔혹한 사형 방식입니다.
연좌제(緣坐制): 범죄를 저지른 사람뿐만 아니라 그와 특정한 관계(주로 가족이나 친척)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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