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역사 속에서 기억하는 영웅들은 대개 높은 관직에 있거나 화려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록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름 없는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하지 못한 일을 스스로 해낸 위대한 영웅들이 숨어 있습니다. 17세기 말, 조선과 일본 사이의 거친 바다를 가르며 우리의 영토 독도를 지켜냈던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군도 아니고 고위 관리도 아닌, 부산 좌수영의 미천한 노비 출신 수군이었습니다. 신분제의 단단한 벽 아래서도 나라의 땅을 제 집처럼 아꼈던 안용복의 이야기는, 오늘날 독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뜨거운 감동의 역사입니다. 지도 한 장 제대로 없던 시절, 오직 애국심 하나로 일본 막부(장군이 정치를 맡아보던 일본의 무신 정권)와 당당히 맞섰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울릉도에서 시작된 운명적인 조우와 납치 사건
안용복의 활약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건국 초부터 섬을 비워두는 공도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동해안의 어민들은 생계를 위해 울릉도와 독도 인근으로 고기잡이를 나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던 중 안용복과 어민들은 울릉도에서 불법으로 어로 활동을 하던 일본 어선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우리 바다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일본인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던 안용복은 그만 일본 어부들에게 붙잡혀 일본 돗토리번으로 압송(죄인을 일정한 곳으로 끌어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용복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 관리들 앞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그의 기개에 놀란 돗토리번주는 이를 에도 막부에 보고했고, 당시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인정하는 서계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비록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주에게 그 문서를 빼앗기는 시련을 겪었지만, 이 사건은 일개 백성이 국가 간의 영토 분쟁 전면에 나선 유례없는 사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도해와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결단
조선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일본의 영토 침범이 계속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자, 그는 1696년 스스로 동료들을 모아 다시 한번 일본으로 향할 결심을 합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붙잡혀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는 가상의 관직을 사칭(이름이나 직업 등을 거짓으로 속여 말함)하며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관복을 갖춰 입고 당당한 기세로 일본에 들어간 그는 일본 관리들을 압도했습니다.
안용복은 돗토리번주를 직접 만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강원도에 속해 있음을 명시한 지도를 제시하며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그는 왜 남의 나라 땅에 자꾸 넘어오느냐며 호통을 쳤고, 일본 측으로부터 다시는 조선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정부의 지원 하나 없이 오직 개인의 의지로 이루어낸 이 민간 외교는 훗날 일본 측 기록인 죽도고나 원록구병자년에 기록되어,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역사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숙종 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의 위대한 공적
안용복의 활약은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인 숙종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록에서는 그가 일본에 가서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과정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일개 백성이 나라의 허락 없이 국경을 넘고 관직을 사칭한 것에 대해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과, 나라가 못한 영토 수호를 해낸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결국 안용복은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활동 덕분에 일본 막부는 공식적으로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로의 도해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스스로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한 역사적 사실로 남게 되었습니다. 안용복이라는 한 개인의 용기가 조선 정부의 영토 인식을 깨웠고, 국제적으로 독도 주권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인 역사적 증거 안용복의 증언
안용복이 일본 관리들 앞에서 펼친 논리는 매우 정교했습니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를 설명하고, 날씨가 맑으면 육안으로 서로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며 두 섬이 하나의 행정 구역임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그는 강원도 지도를 보여주며 독도가 조선의 행정 체계 안에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러한 안용복의 활동은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울도군의 관할 구역으로 명문화하는 데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미 조선의 영토 주권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안용복은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영토에 대한 지식만큼은 그 어떤 유학자보다 해박(아는 것이 아주 많고 넓음)했던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백의종군의 마음으로 바다를 지킨 충절
안용복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관직을 박탈당한 상태에서도 나라를 위해 백의종군했듯이, 안용복 역시 자신의 안위나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영토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벌받을 것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분쟁 없이 어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영토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행보는 당시 사대부 중심의 사회에서 백성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행동한 선구적인 사례이기도 합니다. 안용복은 관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백성이라도 나서야 한다는 당당한 주인 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충절(충성과 절개)은 오늘날 우리가 독도를 수호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습니다.
잊혀진 영웅에서 독도의 수호신으로
오랜 시간 동안 안용복은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신분상의 한계와 무단 출국이라는 법적 문제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현대에 들어 독도 영유권 문제가 중요해지면서 그의 업적은 다시금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울릉도에는 안용복 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용기와 지혜를 기리고 있습니다.
안용복은 단순한 어부가 아니라, 조선의 주권을 바다 너머까지 떨친 위대한 외교가이자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붓 대신 노를 저었고, 칼 대신 논리로 일본을 굴복시켰습니다. 잊혀졌던 그의 이름이 오늘날 다시 불리는 이유는, 독도가 단순히 바다 위의 바위섬이 아니라 안용복과 같은 수많은 민초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용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안용복 장군(후대에 이르러 그의 공을 기려 부르는 칭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평범한 개인의 노력이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안용복은 그 물음에 당당히 그렇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국제 정세가 복잡하고 영토 갈등이 끊이지 않는 오늘날, 안용복의 용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영토를 지키는 힘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 땅에 대한 작은 관심과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독도를 방문하거나 동해 바다를 바라볼 때, 300여 년 전 낡은 배 한 척에 몸을 싣고 거친 파도를 넘었던 안용복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의 외침은 지금도 파도 소리에 섞여 우리에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땅이다!" 이 한마디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투혼(싸우려는 기세)은 대한민국 독도 수호의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금자탑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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