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척화비 건립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조선의 근대화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들었을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수많은 역사적 유적들이 이야기를 품은 채 숨 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국의 길목이나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거친 돌비석 하나는 유독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유물의 이름은 바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입니다. 비석 표면에 깊게 새겨진 글자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약 150여 년 전 이 땅을 가득 채웠던 팽팽한 긴장감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당시는 이양선이라 불리는 서양의 군함들이 조선의 앞바다를 뒤덮으며 문을 열라고 협박하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외세의 폭풍우 속에서 조선 왕조는 타협 대신 문을 더욱 굳게 닫아걸기로 결심했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의를 돌에 새겨 전국 방방곡곡에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단호했던 선택을 바라보며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게 됩니다. 과연 흥선대원군이 굳게 걸어 잠근 통상의 빗장은 몰려오는 서양 열강으로부터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낸 위대한 방패였을까요, 아니면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은 불행한 족쇄였을까요. 이번 시간에는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상징하는 척화비의 진짜 의미를 살펴보고, 과연 이 선택이 조선의 근대화 골든타임을 늦추어 버린 결정적 계기였는지 고등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파헤쳐 보겠습니다.

거센 서양의 파도와 흥선대원군의 단호한 선택

우리가 척화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석이 세워지기 전, 조선을 둘러싸고 있던 긴박한 세계 정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안팎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세도정치의 폐해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이양선들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바다를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무대는 제국주의(강대국들이 무력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영토나 경제적 이권을 빼앗는 정책)라는 침략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서양 열강들은 뛰어난 과학 기술과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의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이웃이었던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참패하여 주권을 빼앗겼고, 일본 역시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문을 열어준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소식들은 조선 지배층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격변기에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감한 대내 개혁을 단행하는 동시에,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문을 닫아거는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서양의 종교와 물질문명이 조선의 가치관을 무너뜨릴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두 차례의 양요와 척화비가 세상에 세워진 이유

조선이 통상 요구를 거부하자, 서양 열강들은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문을 열기 위한 군사 행동에 착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두 차례의 전쟁인 양요(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난리나 전쟁)를 겪으며 수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첫 번째 시련은 1866년에 발생한 병인양요였습니다. 프랑스는 조선이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도들을 처형한 병인박해를 명분으로 강화도를 기습 침략했습니다. 조선의 군대는 한성근 장군의 문수산성 전투와 양헌수 장군의 정족산성 전투에서 격렬하게 싸워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두 번째 시련은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였습니다. 미국은 평양 대동강에서 무단 통상을 요구하다 불타버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로 쳐들어왔습니다. 어재연 장군과 군사들은 광성보에서 현대식 무기를 퍼붓는 미국군에 맞서 화약이 떨어지자 돌을 던지며 끝까지 항전했습니다. 미국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조선 정부가 완강하게 협상을 거부하자 결국 스스로 군함을 돌려 철수했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을 연이어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침략을 막아냈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외교적 의지를 전국의 백성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1871년, 전국의 주요 길목에 척화비(외세와 화친하는 것을 배척하고 물리침)를 전격적으로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핵심 내용과 조선 사회의 변화

흥선대원군이 밀어붙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단순히 외국의 상선과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경제적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서양에서 밀려오는 모든 근대적 물질문명과 종교, 제도, 그리고 사상까지도 조선 땅에 절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전면적인 봉쇄령이었습니다. 전국에 세워진 척화비는 이러한 정책을 백성들의 일상 속에 각인시키는 강력한 시각적 도구였습니다. 백성들은 매일 비석 앞을 지나다니며 서양 세력에 대한 강한 적대감과 경계심을 키웠습니다. 당시 조선의 양반 유학자들은 대외 노선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유교 문화와 질서를 지키고 서양 종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위정척사 사상을 전국적으로 전파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는 외부 세계의 변화상을 관찰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한 채,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폐쇄적인 체제로 변화했습니다. 정부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무기를 개량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등 전쟁 준비에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세계가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눈과 귀를 스스로 가려버린 셈이었습니다.

서양 열강이 원했던 통상의 진짜 목적과 제국주의의 위협

오늘날 역사를 배우는 많은 학생들은 만약 흥선대원군이 조금만 더 유연한 태도로 일찍 문을 열어 무역을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가정을 해보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요구했던 통상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진 폭력적인 진짜 얼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외쳤던 자유 무역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존중하는 평화로운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생산품들을 처분할 소비 시장이 절실했고, 동시에 값싼 원료를 빼앗아 갈 식민지 영토를 찾아 전 세계를 뒤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평화의 이름으로 내민 통상 조약서 뒤편에는 언제나 수십 문의 대포를 장착한 군함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먼저 문을 열었던 청나라는 국토를 빼앗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야 했으며, 국가의 핵심 경제적 이권들을 서양 열강에 통째로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동아시아의 대국들이 서양의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하는 모습을 흥선대원군은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서양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것은 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흥선대원군의 강한 거부는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 기제였습니다.

조선의 근대화 골든타임을 늦추었다는 냉정한 비판과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흥선대원군의 척화비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결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정치, 경제, 사회 등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발전하고 변화함)를 이룩할 수 있었던 마지막 골든타임을 완전히 놓치게 만든 치명적인 역사적 과오였다는 냉정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세계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던 대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서양의 과학 기술과 제도를 발 빠르게 받아들인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의 강력한 근대 국가로 급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두 차례의 양요에서 서양 군대를 물리쳤다는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자신들의 군사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는지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척화비를 전국에 세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보낸 약 10여 년의 아까운 시간 동안, 조선은 세계의 발전된 기술을 습득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할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습니다. 만약 조선이 이 시기에 서양의 실력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무조건적인 거부 대신 우리가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점진적이고 영리한 개항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국력을 키우는 자강의 시간을 벌었더라면, 훗날 외세의 강압에 의해 불평등하게 문을 열고 결국 국권을 상실하는 비극적인 운명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조선이 자생력을 기를 수 있었던 마지막 골든타임을 허비하게 만든 장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흥선대원군의 고뇌와 역사적 의의

역사라는 거울 속에는 단 하나의 단순한 정답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세운 척화비와 그의 타협 없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분명 급변하는 세계 질서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낡은 전통 질서만을 고집하다가 조선의 눈부신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제국주의 열강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우리 민족의 존엄성과 나라의 자주성(남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성질)을 당당하게 지켜내고자 했던 그의 치열한 고뇌와 뜨거운 애국정신만큼은 결코 가볍게 폄하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거대한 침략의 파도 속에서 조선이라는 나라의 자존심을 굳건히 지켜내고자 노력했으며, 실제로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은 그의 지휘 아래 피를 흘려가며 침략자들을 격퇴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척화비는 단순한 고립과 불통의 상징물이 아니라, 외세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자주국방 정신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국제 사회를 살아가는 고등학생 여러분은 척화비가 남긴 역사의 밝은 빛과 어두운 그림자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침략에 당당히 맞서 싸운 자주정신은 우리의 가슴속에 소중히 계승하되, 정세 변화를 읽지 못해 고립을 자초했던 폐쇄적인 태도는 오늘날의 거울로 삼아 반면교사로 활용해야 마땅합니다. 150여 년 전 이 땅에 세워졌던 척화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지혜와 힘이 무엇인지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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