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 그가 진정 꿈꿨던 나라는 왕정의 개혁이었을까 공화국의 시작이었을까

 


어두운 밤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지만 그가 품었던 뜻만큼은 그 어떤 거인보다 거대했던 사람, 바로 전봉준입니다. 1894년의 조선은 안으로는 탐관오리들의 무자비한 수탈로 백성들의 고혈이 짜여 가고 있었고 밖으로는 외세의 거센 파도가 밀려들던 풍전등화의 시기였습니다. 매일 아침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땅을 일구던 농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이 절망의 끝에서 전봉준은 백성들의 손을 잡고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의 외침은 단순히 굶주림을 해결해 달라는 아우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이가 하늘처럼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민주주의와 평등 사상의 선구자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과 같은 공화국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까요.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꿨던 그의 사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고등학생 여러분도 교과서에서 스치듯 보았던 동학 농민 운동의 이면에 숨겨진 뜨거운 정치적 고뇌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불꽃을 피운 고부 봉기와 백성들의 함성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탐학이었습니다.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강제로 짓게 하고 백성들에게 터무니없는 물세를 거두는 등 그의 악행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사발통문을 돌려 뜻을 모으고 백성들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며 봉기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억압받던 민중의 분노는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백산에 모여 전열을 정비하고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성까지 점령하는 놀라운 기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동학의 평등 사상이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은 노비도 여성도 백정도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척양척왜(서양 세력과 일본 세력을 물리침)를 외치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이들의 함성은 조선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농민군은 자신들을 억누던 봉건적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뜨거운 함성의 중심에는 언제나 백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아파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서 있었습니다.

왕을 부정하지 않았던 보국안민의 충정 속에 담긴 진심

우리는 흔히 혁명이라고 하면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렇다면 전봉준도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을 쫓아내고 공화국을 세우려 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당시 전봉준과 동학 농민군은 고종 왕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내걸었던 핵심 슬로건은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이었습니다. 즉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부패한 관리들과 외세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봉준은 국왕에게 충성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오직 간신들을 척결하고 정치를 개혁하여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전봉준의 재판 기록인 공초를 보면 그는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틀 안에서 법과 제도를 바로잡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공화국, 즉 왕이 없는 민주 공화제를 전봉준이 직접적으로 구상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정치는 왕 혼자서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전제 군주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고 군주 역시 법과 도리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도덕적 군주제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비록 왕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백성을 정치의 실질적인 주체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이미 공화국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습니다.

민중이 스스로 다스린 민주주의의 싹 집강소와 폐정 개혁안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자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외세의 개입으로 나라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봉준은 정부군과 전주화약(외세의 개입을 막기 위해 농민군과 관군이 전주에서 맺은 평화 약속)을 체결하고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동학 농민군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민간 자치 기구)라는 전무후무한 자치 기구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스스로 관청의 행정을 감시하고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는 사실상의 민중 자치 정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집강소를 통해 실천하고자 했던 개혁의 내용이 바로 폐정 개혁안(정치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농민군이 제시한 개혁 요구안)입니다. 이 개혁안에는 신분제 폐지, 탐관오리 처벌, 노비 문서 소각, 청춘과부의 재가 허용, 토지의 균등 분배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혁명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비록 중앙 정부에는 왕이 존재했지만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회의를 열고 정치를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집강소의 운영은 왕이 없는 나라, 즉 백성이 스스로 통치하는 공화국의 실질적인 운영 원리와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순간이었습니다.

공화국이라는 근대적 이념과 전봉준의 사상이 만나는 지점

그렇다면 왜 후대의 역사가들은 전봉준의 사상에서 공화국의 비전을 발견하려고 할까요. 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국가를 다스리는 체제를 말합니다. 전봉준이 살았던 19세기 말 조선에는 아직 이러한 개념이 널리 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봉준이 재판 과정에서 남긴 말들을 살펴보면 정치하는 사람은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백성의 신임을 잃은 권력은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근대적인 생각을 명확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 모든 백성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신분제가 사라진 사회에서 정치는 당연히 소수의 양반이 아닌 만인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봉준은 비록 왕이라는 존재를 남겨두었지만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기초는 철저하게 백성들의 평등과 자유에 두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껍데기만 왕정일 뿐 알맹이는 백성이 중심이 되는 근대적 시민 사회의 원리를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봉준이 꿈꿨던 나라는 완전히 성숙한 형태의 공화국은 아니었을지라도 공화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적인 토양을 마련해 준 사상적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에 담긴 영원히 지지 않는 녹두장군의 꿈

일본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전봉준은 다시 한번 농민들을 이끌고 공주 우금치에서 치열한 2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거대한 좌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전봉준은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믿었던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1895년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백성들은 슬픔 속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전봉준은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했습니다. 비록 그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가 뿌린 개혁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정신은 이후 항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고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 공화제 선언으로 마침내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은 130여 년 전 우금치 고개에서 죽창을 들고 피를 흘렸던 농민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간절한 꿈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가 꿈꿨던 세상은 결국 오늘날 우리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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