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만주 망명 서간도와 북간도 황무지에 피어난 항일의 불꽃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누리는 이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의 처절했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문득 잊곤 합니다. 백 년도 더 된 그 시절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고 온 국토가 칼날 아래 신음하던 암흑기에 우리 선조들은 단순히 눈물만 흘리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에서 숨소리조차 감시당하는 무단 통치가 이어지자 뜻있는 수많은 지사들과 평범한 이주민들은 얼어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낯선 만주 땅으로 향했습니다. 서간도와 북간도라고 불리던 그곳은 매서운 칼바람과 황무지만이 가득한 척박한 땅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독립을 향한 마지막 희망의 보루이자 거대한 항일 기지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주권을 빼앗긴 절망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대륙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목숨을 바쳤던 선조들의 뜨거웠던 삶과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펼쳐진 위대한 항일의 역사를 고등학생의 눈높이에서 생생하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압록강 너머 서간도 삼원보에 터를 잡은 경학사와 부민단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망하자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은 더 이상 안에서만 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따라 비밀결사 단체였던 신민회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거대한 망명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계획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 바로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대성학교를 이끌던 이동녕 등 이었습니다. 특히 이회영 형제는 명문가로서 대대로 누려온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헐값에 모두 처분하여 만주로 향하는 자금을 마련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만주 안동성의 삼원보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을 포함한 일대를 우리는 서간도라고 부릅니다. 1911년 서간도 삼원보에 도착한 이들은 혹독한 추위와 원주민들의 텃세를 이겨내며 최초의 자치 기관이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초석인 경학사를 조직했습니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를 한다는 뜻을 담아 표면적으로는 이주민들의 농업을 지도하는 단체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군사 훈련을 준비하는 비밀 단체였습니다. 이후 경학사는 부민단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며 서간도 지역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든든한 행정 기관이자 항일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무장 투쟁을 이끌 정예 독립군의 탄생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찬란한 업적은 바로 군대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의 설립이었습니다. 이회영과 이시영 등은 이주민들의 자녀와 국내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열혈 청년들을 모아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세웠습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단순한 서당이나 기술 학교처럼 꾸몄지만 이곳의 진짜 정체는 조국을 무력으로 되찾을 정예 군인을 키워내는 사관학교였습니다.

이 신흥강습소가 이름을 바꾸고 발전하여 우리가 역사 시간에 자주 접하는 그 유명한 신흥무관학교가 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은 척박한 만주 땅에서 옥수수죽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혹독한 군사 훈련을 견뎌냈습니다. 이들은 근대적인 군사학뿐만 아니라 국어와 국사 교육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고취(생각이나 의욕을 고쳐서 높임)했고 게릴라 전술과 폭탄 제조법 같은 실전 무장 투쟁 기술을 익혔습니다. 1920년 문을 닫을 때까지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수천 명의 졸업생들은 만주 전역으로 흩어져 독립군의 핵심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훗날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으니 서간도는 그야말로 무장 독립운동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만강 너머 북간도 이주민들의 정착과 용정촌의 형성

서간도가 압록강을 건너는 서쪽 만주였다면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연결되는 동쪽 만주 일대를 우리는 북간도라고 부릅니다. 북간도는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인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의 가혹한 세금과 흉년을 피해 강을 건넌 수많은 농민들이 정착해 살아가던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일구었고 대규모의 조선인 마을들을 형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중심지가 바로 용정이라는 동네였습니다.

국내에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민족 종교인 대종교의 지도자 서일을 비롯하여 김약연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이미 기반이 닦여 있던 북간도로 대거 망명했습니다. 이들은 기존에 살고 있던 조선인 이주민 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북간도의 농민들은 비록 자신들도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처지였지만 기꺼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농사지은 쌀을 독립군 군량미로 기부했습니다. 평범한 이주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눈물겨운 헌신이 있었기에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대규모 항일 기지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간민회 조직과 북간도 민족 교육의 요람 명동학교

북간도에 정착한 민족 지도자들은 이주민들의 자치권을 확보하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자치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1913년 설립된 간민회는 북간도 지역 조선인들의 행정과 교육, 산업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간민회는 일제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중국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조선인들의 법적 지위를 안정시켰고 전국의 이주민 마을마다 지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유통망을 구축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북간도에서는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키우기 위해 학교 설립 붐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학교가 바로 김약연 등이 중심이 되어 세운 명동학교였습니다. 명동학교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와 더불어 국외 민족 교육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족 시인 윤동주와 송몽규 같은 인물들이 바로 이 북간도 명동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민족주의 역사의식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또한 서전서숙과 숙명여학교 등 수많은 근대식 학교들이 북간도 곳곳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무지한 민중을 깨우치는 계몽운동과 항일 정신의 거대한 용광로가 되었습니다.

대종교의 중광단 조직과 무장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출범

북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세력이 바로 나철이 창시한 단군 신앙 바탕의 민족 종교인 대종교입니다. 대종교는 주권을 빼앗긴 직후 교단의 중심지를 아예 북간도 왕청현 일대로 옮겼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의 교리는 절망에 빠진 이주민들에게 강렬한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대종교를 믿으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대종교의 지도자였던 서일은 1911년 청년들을 모아 중광단이라는 항일 무장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중광단은 처음에는 종교적 색채를 띠며 청년들의 체력 단련과 정신 교육에 집중했으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본격적인 군사 조직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 중광단이 1919년 3월 운동 이후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발맞추어 확대 개편된 군대가 바로 그 유명한 북로군정서입니다. 북로군정서는 총재 서일과 군사 사령관 김좌진의 지휘 아래 엄격한 군紀(군대 내부의 규율과 질서)를 확립하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여 만주 최고의 정예 독립군 군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룩한 주인공들입니다.

국내 31운동의 불씨를 이어받은 간도 지역의 뜨거웠던 만세 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의 함성은 전국의 산천을 뒤흔들고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서간도와 북간도의 이주민 사회로 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국내의 소식을 접한 북간도 용정의 조선인들은 1919년 3월 13일 수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대규모 독립 선언 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일제의 사주(남을 부추겨서 나쁜 일을 하게 함)를 받은 중국 군대의 총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간도 지역의 만세 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간도 삼원보와 유하현 일대에서도 부민단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농민들이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서간도와 북간도에서 울려 퍼진 만세 운동은 단순히 국내 시위에 호응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는 지난 10년 동안 선조들이 황무지를 일구며 눈물로 건설해 온 독립운동 기지들의 저력과 조직력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전 세계에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세 운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간도 지역의 지사들은 이제 외치는 만세를 넘어 일제와 직접 총칼을 겨누는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봉오동과 청산리의 승리 그리고 간도참변의 눈물로 얼룩진 대가

만세 운동 이후 서간도와 북간도의 항일 기지에서 훈련받은 독립군들은 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하여 일제의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참다못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만주로 진입시켰으나 우리 독립군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만주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일본군을 압도했습니다.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와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등이 연합하여 싸운 청산리 대첩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승리 뒤에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혹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의 기지가 되었던 서간도와 북간도의 조선인 마을들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했습니다. 1920년 말부터 자행된 간도참변으로 인해 수많은 가옥이 불타 없어졌고 평범한 농민과 노인, 어린아이를 가릴 것 없이 수만 명의 조선인 이주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선조들이 피땀 흘려 세운 학교와 자치 기관들은 잿더미로 변했고 독립군들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더 깊은 만주나 러시아 영토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비록 일제의 잔인한 학살로 간도의 항일 기지들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곳에서 피어난 저항 정신과 군사적 자산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면면히(끊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모양) 이어져 후일 광복을 맞이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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