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 7원칙(Left-Right Coalition Seven Principles), 여운형과 김규식이 그려낸 통합의 마지막 꿈

해방 정국이 좌익과 우익으로 완전히 갈라져 있던 그 시절 누군가는 여전히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탁통치 논쟁으로 온 나라가 두 쪽으로 나뉘고 미소공동위원회마저 흔들리던 그 혼란 속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의 간극을 메워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을 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좌우합작 7원칙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 시도가 담고 있던 진심만큼은 지금 돌아봐도 뭉클한 구석이 있습니다. 오늘은 좌우합작 7원칙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 그리고 왜 끝내 좌절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분열의 한복판에서 시작된 통합의 시도

1946년은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극에 달했던 해였습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 논쟁으로 나라가 두 쪽 나 있었고 미소공동위원회마저 협의 대상 범위 문제로 무기한 휴회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온건 좌파와 온건 우파를 아우르는 중도 세력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구상에 호응한 인물이 바로 중도좌파의 여운형과 중도우파의 김규식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좌익과 우익 진영에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온건한 목소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여운형은 일찍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며 좌익 진영에서 신망을 얻고 있었고 김규식은 임시정부 활동 경력을 가진 우익 인사이면서도 유연한 사고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1946년 5월 두 사람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는 좌우 대립으로 표류하던 정국에 마지막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여운형과 김규식 통합을 향한 서로 다른 결의 두 지도자

좌우합작 운동을 이끈 두 주역의 면모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인물로 해방 직후 가장 발 빠르게 건국 준비 작업에 나섰던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늘 실용적이었습니다. 이념보다 실질적인 국가 건설을 우선시했고 좌익 내에서도 소련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 했습니다. 이런 유연함 덕분에 그는 우익 인사들과도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다만 그의 온건 노선은 좌익 강경파로부터는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결국 이 합작 운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극우 세력의 테러 표적이 되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김규식은 젊은 시절부터 해외에서 외교 활동을 펼쳤던 인물로 임시정부에서도 부주석을 지낸 원로급 인사였습니다. 그는 우익 진영에 속했지만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결이 다른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좌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보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속한 진영 내에서 비주류에 가까운 위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좌우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들의 협상 자세와 정치적 판단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균형 잡힌 것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양 진영 강경파의 지지를 온전히 얻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했습니다.

7가지 원칙에 담긴 절충의 지혜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좌우합작위원회는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려는 고심의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첫째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따라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좌익이 강조하던 모스크바 협정 지지와 우익이 강조하던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두 요구를 동시에 담아낸 절충안이었습니다.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셋째 토지 문제와 관련해 몰수와 유상 매입을 절충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좌익이 요구하던 무상몰수와 우익이 선호하던 유상매입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찾으려 한 시도였습니다. 넷째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조속히 제정하기로 했습니다. 다섯째 정치범 석방과 테러 행위 근절을 명시했습니다. 여섯째 합작위원회가 입법기구의 구성 방법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일곱째 언론과 집회 등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원칙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양측이 조금씩 양보하며 만들어낸 균형점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상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절충안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양 진영 모두에게서 외면받은 절충안

그러나 이렇게 힘겹게 만들어진 7원칙은 정작 좌익과 우익 양 진영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좌익 진영 특히 조선공산당은 토지 문제에 있어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유상매입이라는 표현 자체를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타협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친일파 처리 문제가 지나치게 온건하게 다루어졌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우익 진영에서도 불만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은 토지를 유상으로라도 매입해 지주들의 재산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는데 무상분배라는 결론이 나오자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결국 좌익은 너무 우익에 가깝다고 비판했고 우익은 너무 좌익에 가깝다고 비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절충안이 갖는 근본적인 딜레마가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누구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타협안은 결국 누구의 진심 어린 지지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이 지점에서부터 좌우합작 운동은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좌우합작 운동이 실제로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다루려 합니다. 이미 알려진 역사이지만 다시 짚어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 있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끝내 좌절된 통합의 꿈이 남긴 교훈

좌우합작 7원칙 발표 이후에도 좌우합작위원회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구성 등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외 정세는 합작 운동에 불리하게 흘러갔습니다. 1947년 미소 냉전 구도가 본격화되면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성과 없이 표류했고 그해 7월 좌우합작 운동을 이끌던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청년의 총격으로 암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구심점을 잃은 좌우합작위원회는 급속히 동력을 상실했습니다. 김규식이 홀로 남아 활동을 이어가려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해 10월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면서 좌우 협력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구상 자체가 사실상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좌우합작 운동을 돌이켜보면 그 시도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었습니다. 극한으로 치닫던 이념 대립 속에서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 분단을 막아보려 했던 노력은 그 시대에 흔치 않은 용기였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이 운동은 처음부터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양 진영의 강경파를 설득할 만한 실질적인 힘이나 대중적 기반이 부족했고 절충안이라는 태생적 성격 때문에 어느 쪽으로부터도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미소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의 흐름은 이미 온건한 중도 노선이 설 자리를 급속히 좁혀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통합을 향한 마지막 시도는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과 김규식이 보여준 통합을 향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극한 대립의 시대에 대화와 타협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되새기게 하는 역사적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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